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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mize Impact Mar 22. 2021

'피부 안부'를 묻지 마세요

안부와 실례의 경계


근 이삼 년 만에 건너 건너 알고 지낸 지인을 만났다.

같이 합석한 다른 사람들과 식당에 자리를 틀자마자 그녀는 덥석 내게 말을 건넸다.


"오, 얼굴이 전보다 훨씬 좋아지셨네요"


이따금씩 아토피안이 듣는 이런 '피부 안부'는 그 말을 건넨 상대방과 만날 당시 내 상태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강제적으로 소환하게 되는 마법 같은 말이다.


우리가 매일 공기를 마시지만, 숨을 쉴 때 공기를 의식하고 있지 않듯이 만성질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질병을 앓고 있는 상태'에 꽤나 익숙한 상태가 된다.


이처럼 만성병을 앓는 이에게 질병은 공기를 마시듯 일상적인 일이라서 (물론 상태의 경중에 따라 체감도는 달라지지만) 나의 현재 상태가 어떠한지,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그만큼 의식하지 못하거나 또는 의식한다고 해도 그나마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내 자아를 지키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초연함을 유지하려 조용히 애를 쓰게 된다.


그럼에도 그러한 일상을 깨뜨리는 말이 있다면 그게 바로 그놈의 '피부 안부'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또는 만나자마자 얼마 안 되어 상대방이 덥석 피부 안부를 물어오면, 다시금 '내가 정확히 어떤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었지?'를 확인사살받는 기분이라고 표현하면 조금 더 쉬울까? (가끔씩은 안 그래도 잘 알고 있는데 굳이 또 언급해서 초를 칠 필요가 있습니까?라고 되물어주고 싶을 때도 있다)


물론 나도 안다. 그들의 말에는 아무런 악의도 없으며,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말이거나 또는 진심 어린 걱정 또는 호전된 상태에 대한 축하라는 것을.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런 '확인사살 안부'를 물어올 때마다, 내가 지키려고 애썼던 나의 사적인 영역에

초대받지 않은 어떤 파도가 꿀렁하고 밀어닥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나는 이 말을 듣는 것이 아픈지, 불편한지 아니면 오히려 고마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사람들이 피부안부를 물어올 때마다, 내가 지키려고 애썼던 나의 사적인 영역에 초대받지 않은 어떤 파도가 꿀렁하고 밀어닥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단지, 나의 상태가 타인 눈에 얼마나 도드라져 보이는 특징이며, 그게 그들 눈에는 (아주 언급하지 않으면 못 배길 정도로) 신경 쓰이는 일이라는 걸 재차 확인받는 것 같다는 것만 빼곤.


상태가 호전되었을 때 듣는 안부는 차라리 낫다. 가끔 "피부가 왜 그래요?, "왜 이렇게 심해지셨어요?"라는 안부를 묻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다.


사실 아토피안들은 늘 일상적으로 듣는 이야기라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그런 질문은 아무리 들어도 적응하기가 힘들다.


단지, 개인적으로 실례가 될 법할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그들의 순진무구함이 놀랍기만 할 뿐이다.


그런 말이 상대방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그들은 왜 모를까?



솔직해지와 안전한 공간 만들기


작년 여름, 함께 브라질리언 퍼커션을 배우고 있는 동네 동아리 사람들 열댓 명과 워크숍을 하면서 생긴 일이다.


북을 치고 나서 함께 둘러앉아 모처럼 서로 간의 관계에 대해 툭 터놓고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때즈음 내가 이 동아리에 합류한 지 거의 1년이 조금 지났던 시점이었을 거다.


나는 이 마을 동아리를 산이 둘러싸인 동네로 이사를 오면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사를 오게 된 이유는 즉슨, 공기 좋은 곳으로 이주해 피부를 호전시켜보려는 목적이 가장 컸기 때문에 당시 동아리 활동을 시작할 즈음 내 피부 상태는 썩 안정적이지 않았다.


그런 첫 만남에서, 함께 연주하고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동안 내 피부 상태의 들쭉날쭉함 그리고 호전 정도를 동아리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체감하고 있었을 테고, 이따금씩 몇몇 사람들에게서 이런 피부 안부를 들었다.


게 중에는 나의 호전 상태를 축하해준 분들도 있었고, 또 누군가는 내 피부 상태로 (저 딴에는 웃긴다고) 개그를 치려다가 호되게 눈칫밥을 먹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그 워크숍이 있던 날, 원을 그리고 앉은 사람들은 저마다 그간의 활동의 소회를 맺었다.


저마다 좋은 기억들이 대부분이라 말했지만, 누군가는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이 관계 속에 오가는 말에 받았던 상처, 그것이 그를 어떤 방식으로 화나게 했는지에 대해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드디어 원을 돌며, 차례가 되었을 때 나에게도 이상한 용기가 생겼다.


"여러분, 저에게 물어오시는 말들이 악의가 없다는 것도 어떠한 의도도 없다는 것도 잘 알지만 제 상태가 좋든, 좋지 않든 앞으로 피부 안부는 묻지 말아 주으면 합니다"



그리고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그런 말들이 나를 마음을 어떻게 만드는지를 조용히 밝혔다.

내심 내가 분위기를 너무 숙연하게 만들면 어쩌나  조금 걱정도 하면서...


하지만 말이 끝나고, 그 자리에서 나의 내밀한 속사정이 환대받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말하지 않았다면 전혀 몰랐을 거라고,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다고 보내주는 사람들의 눈빛을 읽었다.


물론, 아무 데 가서나 이런 말을 나눌 수 없다. 남들에게는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는 나의 속사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내가 속한 동아리의 사람들이 만들어 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도 안다.


덕분에, 피부 안부를 들을 때마다 늘 목구멍에 뭔가 걸리는 느낌을 생애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고백했다. 방감도 느꼈다.


나는 안다. 나는 그리고 수많은 아토피안들이 앞으로도 여전히 이런 '안부'를 들으면서 살아가게 될 것을.


그럼에도 이 글을 쓴다. 조금 더 건강하게 내 질병과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상적으로 아무렇지 않게 오가는 타인의 말에 내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충분히 관찰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솔직하고 정리된 말로 타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의 안전한 공간을 지켜내고 싶다는 작은 마음은 더 많은 이가 알아줬으면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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