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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별 Dec 06. 2018

십 년 만의 임시휴업

늦됨의 자서전

좋아했던 소설가 아멜리 노통브의 『게으름의 자서전』이라는 책을 읽고, 언젠가 자서전을 쓰게 된다면 『늦됨의 자서전』이라는 제목을 붙여야겠다는 다짐 아닌 다짐을 한 적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꽤 무던하고 늦된 사람이다. 어디 하나 특출 난 것 없이 학창 시절을 무던하게 버텨내고는 어학연수니 유학은 말할 것도 없고 그 흔한 배낭여행 한 번 해본 적 없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휴학도 없이 졸업하고 짧지만 강렬했던 취준생 기간을 거쳐 5년만 버텨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직장생활 10년이 지난 어느 날, 운이 좋게도 퇴사를 하지 않고도 해외살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사표를 멋지게 딱 꺼내 들고 해외로 떠났어야 더 극적이었으려나. 하지만 적잖이 쫄보인 나는 아마 이런 기회가 아니었다면 쉼 없이 서울의 어느 빌딩 안에서 모니터를 마주하고 있었을 테지.


그 나이에 무슨 어학연수

근무하던 회사에서는 글로벌 시대에 발맞춰 글로벌 감각을 기르자는 취지로 어학연수 휴직제도를 신설했다. 1차 신청 마감날 팀장님의 추천서를 받아 제출을 했고, 곧 인사팀으로부터 승인이 떨어졌다. 소식을 들은 친구나 동료들 대부분 나는 부러워했지만, 부모님은 적잖이 황당해하셨던 것 같다. 어학연수 간다는 얘기를 들은 고모가 ‘그 나이에 무슨 어학연수냐’고 반문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부모님의 반응도 당연했던 것 같다.


이럴 거면 그냥 어학연수나 갈까 봐요

사실 마냥 신나고 즐거운 마음으로 휴직을 신청한 것은 아니었다. 몇 년 전부터 조금씩 망가져서 나를 괴롭히던 허리디스크 때문에 예매해뒀던 호두까기 인형 공연표를 눈물을 머금고 후배에게 전해주고, 억지로 출근했다가 회의실에서 뛰쳐나와 그 길로 집에 가 병가를 내고 한 달 반간 쉬며 치료를 받았었다. 극적으로 회복하고 돌아간 회사에서는 언제나처럼 어렵고 풀기 힘든 문제들만 산적해있었고, 또 이런저런 소모적인 사건들과 각종 이슈들 사이에서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질 때쯤, 몇 주전에 봤던 휴직 신청 공고가 불현듯 떠올랐다. 팀장님과 면담을 하던 중에 농담 삼아, 이럴 거면 그냥 어학연수나 갈까 봐요,라고 던진 말에 오히려 팀장님이 반색하며 휴직 신청을 종용(?)해주셨다.


정신 차려보니 캐나다, 빅토리아

아무튼 나는 서른 하고도 여섯이나 더 먹어버린 나이에 여차 저차 하여, 어쩌다 보니, 캐나다의 서쪽 끝 밴쿠버섬에 위치한 작고 아름다운 동네, 빅토리아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총 180일간의 여정, 16주간의 어학원 생활, 62일간의 북미 투어, 21대의 비행기, 5대의 페리, 2대의 클리퍼, 10대의 버스, 그리고 여행의 부분 부분 함께 해 준 11명의 친구들. 돌이켜보면 찰나와 같았던 짧은 시간이지만,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진했던 그 시간을, 그리고 생각들을 남겨보려 한다.


7월 1일, 캐나다의 독립기념일을 축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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