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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별 Mar 08. 2019

할머니는 파가 싫다고 하셨어

[food essay] 파

할머니는 굉장히 호쾌한 분이셨다. 할머니 세대에겐 어울리지 않는 말일 수 있으나 요즘 표현을 붙여보자면 쏘쿨(so cool). 나도 심심찮게 주변 사람들에게서 ‘쿨하다’는 평을 듣는 편인데, 나의 이런 쿨함은 할머니로부터 시작되어 아빠를 통해 나에게 왔나 싶다. 팔십이 되어도 돌도 씹어 먹을 것만 같은 에너지의 할머니도 싫어하는 음식이 있었으니, 바로 ‘파’다.


“누가 파만 쏙쏙 빼버렸어?”

나는 아마 어디론가 여행을 갔던 어느 명절날, 동생과 엄마는 집에서 몇 가지 전과 음식을 만들어서 시골(이라고 하면 할머니는 늘 ‘늬집이 더 시골이다’라고 역정을 내셨지만, 그래도 할머니 계신 곳이 영원히 시골)로 싸들고 내려갔다. 동생이 하루 종일 열심히 꽂은 산적에서 누가 파만 쏙쏙 빼서 이쑤시개와 함께 모아뒀단다.

“어허! 누가 파만 쏙쏙 빼버렸어?”

동생의 치기 어린 호통에 할머니가 슥 지나가며 한 마디 하시더란다.

“나다”


편식 좀 하면 뭐 어때?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더니 할머니도 편식을 할 줄이야. 하긴 생각해보니 나도 할머니가 되어도 토마토는 즐기지 않을 것 같고, 당근을 생으로 와그작와그작 먹을 일도 없을 것 같다. 여태 그렇게 잘 살아왔는데 여든이든 아흔이든 싫어하는 음식 좀 안 먹고 좋아하는 음식 좀 즐겨먹으면 뭐 어떻겠냐. 뭐든 맛있게 먹고 잘 소화시킬 수만 있다면 행복하지 않을까.


좋아하는 것만 하기에도 모자란 인생

이것저것 잡다한 것에 관심이 많은 나는 싫어하는 것도 많지만 그만큼 좋아하는 것도 많다. 좋아하는 음악, 음식, 책, 취미, 그리고 사람.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여행 다니고, 맛있는 거 먹고 다니고, 씹고 뜯고 즐기고. 좋아하는 것만 하기에도 모자란 인생, 싫은데 억지로 해야 하는 것 중에 몇 가지는 쿨하게 놓아버려도 좋을 것 같다.

쿨하게 파를 패스해버린 할머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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