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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동네에 산다

8.암호해석 ㄴ 쯔쯔 돈돈, 보이스카웃

by 사색유희

‘첫째를 보고 저렇게 두면 안 되겠다 싶어서

둘째는 학습지를 시켰어.’

동생이 유치원 때부터 학습지를 한 사실을 어른이 되고, 엄마의 통화를 엿듣고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동생도 동네 친구들도 모두 학습지를 하고 있었다.

학습지 숙제가 없는 건 나뿐이었다.

그걸 마냥 부럽게 볼 뿐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공부를 좋아하는데, 기초를 몰라 맨땅을 헤엄치는 기분이 들곤 했다.


중학교 가기 전엔 빨간 백과사전이 나의 선생님이었다.

컬러풀하고 부드러운 종이 감촉이 좋았다.

그 책으로 알파벳 공부를 했다.

새로운 걸 보고 익히는 게 너무 신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할머니가 외상으로 옆집 아저씨 과외 교실에 보냈다.

나를 제외한 동네 친구들 모두 선행 학습 중이었다.

동네 친구들이 모두 있어서 기대감이 컸다.

하지만 기대감은 몇 분만에 사라졌다.

알파벳 중 하나가 틀렸다.

아저씨는 이래서 독학하면 안 된다며, 친구들의 진도를 못 따라간다고 망신을 줬다.

첫날 크게 마음이 상한 나는 이런저런 핑계로 그 수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도 크게 관여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를 첫 수업에서 망신 주고 밥줄이 끈긴 옆집 아저씨의 비난만 이어질 뿐...


부모는 나의 공부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100점짜리 시험지를 신나게 흔들며 와도

칭찬은커녕 무심한 표정 앞에 번번이 낙담했다.

동생이 첫 상장을 받은 날,

부모는 처음으로 액자를 사 와 그 상장을 전시했다.

몇 개 안 되는 내 상장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부화가 나서 동생 상장을 찢어 버렸다.

그럴 때면 작은 숙모의 “첫째 딸은 살림 밑천이니 상고 보내요~”하는 말이 맴돌아 속상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빠에 의해 상고로 진로가 결정되고,

처음으로 삶을 자포자기했다.

엄마가 몰래 말했다.

“미안해. 인문계 가야 하는데, 가라고 못해서...”

처음이었다.

엄마가 내 삶에 무언가 이야기를 해준 것…

그때 그 말이 있어서 엄마에겐 서운함이 남지 않았다.

표현해 준 적은 없지만 내 성향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엄마에게 가장 크게 남은 미련은 피아노를 못 가르친 것이었다.

“그때 피아노를 가르쳤으면 학원 선생이라도 하며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때 어려워도 가르쳤어야 했는데…”

표현이 없던 엄마가 두고두고 몇 번이나 했던 말이다.

그럼, 나는 “피아노 할 생각이 없었는데, 뭘” 무심히 미련 둘 필요 없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6학년, 늦게 피아노를 배웠었다.

남들 다하는 거 늦게라도 배워서 너무 재밌고 좋았다.

그런데 언제나 ‘눈치’가 내 발목을 잡았다.

집에 돈이 없는 게 보이면 ‘학원 안 가!’라는 선언이 먼저 튀어나왔다.

원장 부부는 집에 찾아와 나를 끝까지 가르치자고 했다.

동생은 안 다녀도 되지만 이 아이는 가르쳐 볼만하다고…

돈 때문이라면 안 받아도 좋다고 했다.

엄마는 내게 “어떡할래” 물었고,

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번번이 돈 앞에 좌초되었다.

배우는 걸 좋아하면서도 관심 없는 척 포기를 택했다.

그 와중에 동생은 학원, 사고 싶은 장난감, 새 옷을 참도 잘 얻었다.


동생이 대학교 입학금 댈 형편이 안돼서

대학을 포기하겠다고 나를 붙잡고 하소연했었다.

입학금은 어떻게든 마련해 줄 테니 그다음은 등록금이든 알바든 알아서 해결하라고 겨우 달래 학교를 보냈다.

나처럼 돈 때문에 기회를 포기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IMF의 광풍이 가장 심했던 때다.

한 달 생활비가 5만 원 남짓. 점심도 어른들에게 더부살이하듯 눈치 없이 얻어먹고 다녔었다.

내가 통장 전부를 털어 동생에게 등록금으로 주었을 때

동생은 외삼촌에게 또 등록금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이야길 얼마 전에야 알게 됐다.

동생은 그때도 그 후에도 내 전재산을 털어

경험을 선물한 걸 까맣게 잊은 것처럼 보였다.


아빠 사업이 망해 빚 갚고 월세를 전전하던 시기라 부모님과 나까지 각자 셋이 돈을 벌어도 돈이 모이지 않아 너무 힘들었었다.

IMF 시절 동생은 월 50만 원씩 꼬박 용돈+@용돈까지 받아갔다.

내 급여보다 많은 돈이었다.

남들은 학자금까지 빌려 학교에 다니고

졸업 후에도 대출 갚기 바빴다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았다.

내가 대학을 갔으면

학자금 대출을 알았을 텐데,

한 학점 펑크 나서 한 학기 등록금이 필요하다는 거짓말도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텐데...


아주 사소해 보여도 누군가는 경험할 기회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간다.

경험이 없으니 작은 암호를 해석하고, 기회를 얻기도 어렵다.


기생충 영화 속 기우는 이야기의 전반에 걸쳐 암호를 해석한다.

보이스카우트 경험이 없었다면 ‘쯧쯧 돈돈’ 그 암호를 해석할 수 있었을까?

기우의 보이스카우트 경험이 온 가족의 취업부터 지하에 갇힌 아버지의 편지를 해독하는 것까지 할 수 있는 눈을 가진 것은 가족 중 가장 비싼 경험을 한 덕이 아닐까?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지만

모두가 부자를 꿈꾸지는 않는다고 한다.

나도 그랬다.

내가 부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 길로 발도 들여놓지 못한 거다.

영화 엔딩에서 내내 '쯔쯔돈돈'이 맴돌았다.

기우가 암호를 해석해서 부자가 될 결심이라도 해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기우는 비극 속에서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웃는 병에 걸려 고통의 정중앙을 피해 살아남는다.

나는 기우처럼 보이스카우트식의 암호 해석은 못한다.

하지만 고통의 정중앙에서 두 눈 똑바로 뜨고 싸워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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