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현실적 현실 (요즘도 그런 동네가 있더라고요)
"요즘도 그런 동네가 있더라고요~
어디 사세요?"
"그런 동네 살아요."
원이에게 학교 엄마들 모임에서의 대화를 전해 듣고,
우리 사이엔 정적이 흘렀다.
순간 느낀 모멸감은 말하지 않아도 같았다.
우리 동네 아이들에게도 아파트 이름으로 사는 곳을 말하는
문화가 번져 아파트가 아닌 곳에서 살아온
그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전에 없는 검정이 뿌려졌다.
대기업 커리어 우먼인 원이는 전업주부인 그들의 모임에
괴리를 느꼈다.
그리고 그 일이 이후
인생 첫 대출로 동네 아파트를 샀다.
"좋아?"
"편해"
나는 아파트가 편하다는 게 어떤 건지 공감할 수 없었지만
원이 표정에서의 평안함은 느낄 수 있었다.
동네를 떠나 아파트에 사는 동생, 부모님, 고모, 원이까지.
이 동네를 떠난 후 그들에게 깃든 해사한 표정의 이유가 그런 것이었을까?
이곳을 떠난 후 이곳을 완전히 잊게 될 정도의 편안함은 어떤 것일까?
낡고 고장 난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택한 건 탈출이 아니라는 걸
공사가 망한 후에야 깨달았다.
"이 동네는~ 여기 집들은~ 고치려고 하면 안 돼.
여기 고치느니 나가서 월세라도 사는 게 나아
그게 돈 버는 거야"
고친다고 해결되지 않는 낡음
고친 만큼 더 큰 고장이 기다리는 낡음
고치면 삶에 숨통이 트일 줄 알았는데 곧 돌아오는 불운
먼저 깨달은 환이는 나중에 돈이 생겨도 절대!
집 고칠 생각은 하지 말라는 당부를 남기고 이 동네를 떠났다.
환이는 결혼 1년 만에 아내를 잃었다.
대출받은 돈으로 낡은 집을 고쳐 신혼 분위기를 냈다.
그런데 아내를 잃었다
몸이 약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모두에게 그 죽음은 너무도 돌발적으로 다가왔다.
아직 30대 초반...
돌연 중환자실로 들어가 나오지 못하게 될 줄 아무도 몰랐다.
환이가 동네를 떠나고도 절대 집을 고쳐지 말라고
몇 번이고 당부했던 말이...
그제야 귀를 후려쳤다.
고장 난 구석을 고치려던 것뿐인데, 더 엉망이 되었다.
낡은 동네 가벼운 주머니 사정에도 무언가 수선하려면
웃돈을 얹어 줘야 한다.
공사를 맞은 이에게 고쳐주는 것만도 고맙게 생각했다.
밥 값을 주고도 매일 식사나 후식을 대접했다.
공사 중간쯤 지인 소개로 만난 그 사람은
친구에게 갚을 돈이 있던 차에 그 소개로 연결된 일당 잡부였다.
일일 잡부를 전전하다 부호로 보인다는 조선족의 사업의
바지사장 역할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 사람의 게으름에 공사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인부들이 재촉했다.
"거 빨리빨리 좀 해요. 그래야 아가씨도 빨리 정리하고 쉬지."
공사 내내 몸 값 운운하던 사장의 결과물은 처참했다.
추가 수선을 맡기고 싶은 마음도 안 생겼다.
큰 틀의 공사 정리도 안되었는데,
야무지지도 않으면서 디테일에 빠져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다시...
공황이 생겼다.
정말 '기생충' 영화 속 집안보다 못한 환경이 되었다.
폐허 속에 몸만 잠시 기댄 것 같았다.
그해 겨울,
앞 집 민주네 엄마는 자기네 집 앞에 물이 흐른다며
윗 골목인 우리 집 수도계량기를 잠갔다.
한 겨울에 계량기가 터졌다.
보일러도 고장 나고, 난로 하나로 혹한을 견뎌야 했다.
얼음이 조금은 녹아야 공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꼬박 한 달을 그렇게 지냈다.
매일 아침 목욕탕에서 씻고 출근했다.
신고를 하려다 민주네 엄마가 한 일이라는 걸 알고 포기했다.
싫어도 어려서 나고 자라며 보았고,
나를 지켜주는 동네 어른이 깊은 연민을 느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일이 있고,
나의 고양이 진돌이가 떠났다.
혹한의 한가운데 진돌이가
폭염의 한가운데 싻이가
몇 개월 차이로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나의 솔메이트
나의 첫애
나의 최애
나와 가족이 가장 깊은 어둠에 빠져있을 때 나타난 구원자
삯!
삯이가 떠나고 더 이상 그 공간을 견디기 어려웠다.
막막했다.
누군가에겐 비현실인 영화 속 배경지
그러나
또 다른 누군가인 나에겐 오늘을 버텨내는 현실 속 공간.
영화처럼, 영화보다 더
현실의 공간에서 비현실적인 일들을 겪기 바빴다.
나는 항상 버티기만 바빴구나.
한 번도 진짜 탈출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상황을 반전시켜 보겠다는 생각을 버리기로 했다.
탈출하고 싶다.
탈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