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 8. 진정성의 함정

by 민 과장


일을 열심히 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다르다. “진정성 영업이 내 무기입니다”. 2020년 팀 워크숍에서 자신 있게 발표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팀장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좋은 방향이네”라고 했다. 그땐 ‘성실함’이 정답인 줄 알았다. 1년 뒤, 그 ‘진정성’이 독이 될 줄은 몰랐다. 결론부터 말하면, 내게 필요한 건 '많이 보이는 진정성'이 아니라 '제때 건네는 한 문장'이었다.


2021년, 두 번째 조직 개편. 새로운 거래처가 쏟아졌다. 나는 ‘진정성 = 자주 보이기’라는 공식을 맹신했다. 하루에도 두세 번 대형 병원을 들렀고 불편한 상황이 생기면 바로 뛰어가 임시로 붙이고, 메우고, 돌아보고 했다. 무료 A/S 기사처럼 움직이면서도 그게 진정성이라 믿었다.


K병원 원장님은 특히 까다로웠다. 원장님을 뵙기 어려운 병원이라 점심시간에 찾아가 신제품 출시나 학회 일정을 소개했고, 기회가 되면 식사도 함께했다. 짧은 면담은 늘 시장 얘기로 시작했다.


“주변 병원들은 어때요?”

“요즘 A, B, C는 매출이 상승했어요. E, F는 휴가 시즌이라 살짝 빠졌습니다.”

“원장님, 현재 월 1천만 원 사용 중이고 두 달 뒤, 재계약이 예정입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원장님이 궁금해한 건 늘 비교와 리스크였다. 재계약이 두 달 앞으로 다가왔을 때, 원장님은 손가락으로 OK를 그려 보였다. 순조롭다고 생각했다.


한 달 뒤, 타사 장비가 멈췄다. 나는 또 ‘진정성’을 발휘했다. 자사 안전 가이드 범위 내에서 임시 조치를 하고, 즉시 해당 업체 A/S를 안내했다. 경영팀은 고맙다며 간식을 건넸고, 나는 이 선행을 원장님께 보고하고 싶었다. 재계약도 한 달 앞이니 자연스럽게 언급할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상담실 문이 ‘탁’ 하고 열렸다. 마스크를 반쯤 내린 원장님이 숨을 고르며 들어왔다.


“아, 원장님.”

“잠시만요.” 원장님은 문 앞에서 경영팀장과 짧게 이야기를 나눴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어떤 일 때문에 그러세요?”

“원장님, 타사 장비 임시로 살려놨습니다. 바로 업체 연락하시면 됩니다.”

“그런데요?”

“아… 다음 달에 재계약도 진행해야 합니다.”

“바쁜데 그 얘기하려고 부른 거예요?”

“아… 죄송합니다.”

“다음부터 명확한 의제랑 기대 결과를 먼저 주시고 미팅 잡으세요.”


원장님은 발로 문을 밀치듯 열고 진료실로 사라졌다. 문이 다시 ‘탁’ 닫쳤고 에어컨 바람 소리만 남았다. 내가 쌓아온 ‘진정성’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소리였다.


잠시 후, 경영팀장이 들어왔다.


“원장님은 하루에 영업사원 7명을 만나요. 각 10분씩만 해도 70분이죠. 다들 급하다며 와서 결론 없이 시간만 쓰고 가요. 아까도 중요한 화상 미팅 때문에 급하셨거든요. 타이밍이 안 좋았네요.”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생각한 ‘진정성’은 상대방 입장에선 ‘번거로움’ 일 수 있다는 걸. 나는 자주 얼굴을 비추고, 궂은일을 도와주며 인간적인 관계를 쌓는 게 영업이라 믿었지만, 원장님이 원한 건 '핵심을 짧게, 결정은 가볍게'였다.


이후, 미운털이 박혔는지 미팅을 잡기 어려워졌다. 돌이켜보니 원장님은 늘 신호를 보냈다. 짧은 점심시간, 손가락 OK 사인, “주변 병원은 어때요? “라는 질문. 그 신호들은 '한 장이면 된다'는 뜻이었다. 비교, 리스크, 그리고 다음 걸음 하나.


그날 밤, 나는 메모를 고쳐 썼다.


- 진정성 자주 보이기

- 진정성 = 적시에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기

- 병원장이 원하는 것: 시장 비교, 리스크, 액션

- 만남 전: 의제·소요시간·기대 결과를 먼저 공유

- 판단 기준: 열심히 했냐가 아닌 도움이 됐나


그리고 체크리스트 대신 습관을 고쳤다. 첫째, 미팅 전 한 줄 의제. 둘째, 미팅은 10분. 셋째, 미팅이 끝나면 다음 걸음 하나를 정하고 나온다.


진정성의 함정에서 빠져나온 순간이었다. 이제 알았다. 프로는 ‘항상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 순간 정확히 답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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