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페인 시즌이었다. 5년 차, 나는 실적 1위였다. 고객과의 대화법이 몸에 배었고, 어떤 원장님 앞에서도 막힘이 없었다. ‘이론보단 실전’이라고 믿었다. 회사에서 제품 A를 중점 판매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번에도 쉬울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복잡한 제품이었다. 그래서 ‘말’이 아니라 ‘표’를 만들었다. A 제품의 핵심만 간단히 정리했다.
[A 제품 핵심 3가지]
• 가격: 경쟁사 D보다 900원 저렴
• 효과: 1년 후 95% 유지
• 특징: 쉽게 쓸 수 있지만, 최고급 결과는 어려움
이 표를 들고 거래처를 돌았다. “원장님, 이번 캠페인 제품인데 프로모션 진행합니다. “로 시작하기도, “지금 쓰시는 제품들 정리하실 때인데, 이번 기회에 바꿔보시죠.”로 말하기도 했다. 처음 여섯 곳은 순조로웠다. “가격이 매력적이네”, “안정성이 좋다니 한번 써볼까” 평소처럼 익숙한 말솜씨만으로 충분했다. 6곳 중 4곳이 구매했다. 나쁘지 않은 출발이었다.
문제는 일곱 번째 거래처였다. 이 원장님은 달랐다. 교수 출신으로, 논문도 여러 편 쓴 분이었다. “원장님, D 제품보다 900원 저렴하고 안정성도 높습니다.” 자료를 건네며 설명을 이어갔다.
“1년 후에도 효과가 유지되는 비율이 어느 정도지?” 원장님이 물었다.
“어… 잠시만요. 바로 찾아보겠습니다.” 노트북을 열어 자료를 훑었다.
“1년 후 95% 정도가 유지되는 것으로…”
“그럼 D 제품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 거야? 그리고 그게 우리 병원 환자들한테도 같은 수치야?”
나는 두 번 머뭇거렸다. 표만 외웠지, 숫자가 무슨 의미인지, 어떤 조건에서 나온 결과인지는 몰랐다. 그 순간, 호기심이던 표정이 의심으로 바뀌었다.
“D 제품보다 약 3% 낮은 경우가 있습니다. 다만—”
“알겠어. 생각해 볼게. 그런데 너 내년에 과장 승진 심사라며? 데이터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과장을 하나?”
그 한마디가 귀에 박혔다. 차가워진 거래처 문을 나서며 자켓을 벗었다. ‘영업 1위’라는 자부심이 벗겨졌다. 경험과 말솜씨로 승승장구할 수 있다고 믿던 지난 5년이, 숫자 하나 앞에서 무너졌다. 집에 돌아와 거울을 봤다. 5년 차 베테랑이 아니라, 데이터 앞에서 더듬거리는 초보가 보였다.
그날 밤, 노트북을 열었다. 제품 설명서, 연구 보고서, 임상 결과. 숫자만 보면 졸음이 오던 자료를 이제는 다르게 읽기 시작했다.
• 효과 유지율 95%의 진실: 젊고 건강한 사람 기준
• 환자별 차이: 나이, 흡연, 당뇨 여부에 따라 10%까지 차이
그때 깨달았다. ‘95% 안정성’은 단순 숫자가 아니었다. 20대 건강한 환자에선 98%, 60대 당뇨 환자에선 85%였다. 이 차이를 아는 것이 진짜 전문성이었다. 피상적으로만 알던 지식이 퍼즐처럼 맞춰졌다. 이 제품이 어떤 환자에게 좋은지, 어떤 경우 조심해야 하는지, 어떻게 사용하면 더 효과적인지가 그림으로 그려졌다.
2주 후, 그 원장님을 다시 찾았다. 이번엔 준비된 질문 3개를 들고 갔다.
1. “원장님이 가장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효과 지속성입니까?”
2. “그 기준에서 A는 일반적으론 경쟁 제품보다 약간 낮지만, 환자를 선별하고 사용법을 조정하면 거의 비슷해집니다. “
3. “그래서 제가 준비한 맞춤 방법을 적용하면 위험은 줄고, 비용은 합리적입니다.”
원장님이 자료를 꼼꼼히 살폈다. “환자군별 데이터까지 준비했네? 우리 병원 60대 환자가 많은데, 그 부분까지 고려한 거야?”
“네, 60대 기준으로 재계산했습니다. 일반 사용 시 85%지만, 제가 제안하는 방법으로는 91%까지 올릴 수 있습니다.”
“오, 공부 많이 했네. 이제 대화가 되는군.” 원장님이 처음으로 웃었다. “자, 그럼 100개부터 시작해 보자. 결과 좋으면 더 늘리고.” 그날 대량 주문을 받았다.
다시 배웠다. 경험에서 나온 말솜씨에 ‘정확한 지식’을 더해야, 말이 설득력을 갖는다. 지식 없는 영업은 한계가 있고, 지식을 갖춘 영업은 신뢰를 얻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객이 진짜 궁금해하는 것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날이 대리에서 과장으로 승진하는 첫걸음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