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의 무게

by 민이새

눈치는 공기처럼 존재하지만, 공기보다 훨씬 무겁다.

한 번도 눈에 보인 적 없고, 말로 정확히 정의한 적도 없지만
우리는 자라면서, 혹은 어른이 되면서, 스스로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눈치를 읽는 법부터 배웠다.


어릴 때는 눈치라는 말의 무게를 몰랐던 것 같다.
밥 먹다 말고 질문을 던졌을 때 어른들이 갑자기 말수가 줄어들고,
어느 날은 어떤 말 한마디로 공기의 결이 바뀌는 걸 느꼈을 때,
그제야 처음으로 ‘아, 지금은 말하면 안 되는 시간이구나’라는 걸 어렴풋이 배웠다.


그 후 자라오면서

누구의 말보다 먼저 표정을 읽게 되었고,
대화의 분위기보다 한 발 앞서 침묵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감지는 습관이 되었고,
습관은 결국 사람의 성격을 만든다.


나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빠르다는 건 칭찬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늘 상황을 먼저 조율하고 내 감정을 뒤로 미뤄두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말할 타이밍을 고민하다 기회를 놓치고,
농담을 건넬까 하다 괜히 분위기 망칠까 봐 입을 다물고,
내가 원하는 걸 요구하지 못한 채,
‘상대가 불편해하지 않을까’를 먼저 걱정한다.


어쩌면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상대의 기분’이라는 허공의 저울에 나를 얹어 살아온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저울은 늘 나를 가볍게 만들거나, 무겁게 짓눌러왔다.


눈치는 배려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자신을 조심스럽게 숨기는 위축의 감정이 되기도 한다.

처음엔 섬세함을 키워주는 것 같지만,

지나치면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고,

결국엔 스스로를 갉아먹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그래서 눈치를 읽는 능력은 사회적 기술이지만,
눈치에 휘둘리는 감정은 내면을 파괴하는 독이 되기도 한다.


나는 어떤 자리에서든
불편한 기색을 먼저 감지하고,
그에 따라 말투와 호흡, 심지어 웃는 방식까지 조절한다.
이게 타인을 배려하는 성숙한 태도라면 좋겠지만
사실은 그저 상처받지 않으려는 오래된 방어기제일 뿐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보다
‘지금 이 분위기에 어울리는 말’을 더 잘 찾게 되었고,
‘내 감정’보다
‘상대가 원하는 감정’에 더 익숙해졌다.


그러다 보니
내가 뭘 원하는 사람인지
점점 모르게 되었다.


가끔은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지금 말하고 싶어요.
지금 웃고 싶지 않아요.
이 상황이 불편해요.
그 말을 삼키느라 더 힘들어요.”


하지만 나는 여전히 눈치를 본다.
상대가 상처받을까 봐,
혹은 내가 예민한 사람으로 보일까 봐,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이제는 안다.
눈치는 ‘살아남기 위한 감각’에서 시작됐지만
이제는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감각’이 되었다는 걸.


그래서 나는 조금씩 연습하고 있다.
눈치를 너무 오래 보고 나면,
자신을 제대로 보는 눈을 잃게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내 감정을 더듬는 연습을 한다.
내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어디서부터 나를 설명할 수 있을지를 천천히 짚어간다.


이제는 누군가의 표정보다
내 마음의 표정을 먼저 들여다보려고 한다.
그건 어쩌면 내가 나에게 건네는
가장 작은 존중이자
가장 깊은 회복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눈치의 무게는 여전히 무겁지만
그 무게에 눌리지 않고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한 연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연습은,
누군가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것이다.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나는 오늘도 그 무게에서
조금씩 나를 들어 올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