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5주의 수집
#01
제가 생각하는 글쓰기는 생각을 깊게 하는 게 아니라,
생각을 시작하게 만드는 일인 것 같아요.
- 정영수 작가 (편집자K 유튜브 中)
매주 일요일 저녁, 일주일 동안 마주했던 좋은 문장들을 꼽아 브런치에 기록한다. 이러한 글쓰기를 하는 이유는, 금새 흩어져버리고 마는 영감을 붙잡아두고 싶어서라고 말하겠다. 최초의 영감은 소중하니까. 영국에서 처음으로 유럽의 길거리 풍경을 보았을 때, 그리고 <윤희에게>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잔잔한 감동 등. 이것들을 다시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최초의 순간에서 느꼈던 강렬한 영감에 비하면 그 감흥은 덜할 것이 분명하다. 책을 읽다가 공감이 가는 문장을 발견하거나, 길거리에서 아무 의미 없이 쓰여진 문구에 괜시리 위로를 받을 때, 나는 그 순간의 감정들을 한없이 간직하고 싶었다. 그 때의 감정을 다시 느끼는 건 불가능하더라도 당시 내가 어떤 감정에 사로잡혔는지는 글쓰기를 통해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글쓰기는 생각을 시작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정영수 작가는 이야기했다. 맞다. 최초의 영감이 금새 흩어져 어느새 내 일상 속에서 희석되고 있는 중이라면, 글쓰기는 그것을 강제로 꺼내어 다시 살펴보게 하게끔 만든다. '그 문장이 왜 좋았을까?', '그 문장과 마주했을 때 나의 첫 느낌은 어땠을까?'. 굳이 그 내용이 깊거나 심오할 필요는 없다. 실없는 유머에 큰 재미를 느꼈을 수도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글쓰기가 결국 그 때의 나를 다시 돌아볼 수 있도록 생각을 시작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쉴 틈 없이 해야 할 일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스스로를 생각할 여유를 가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쉽지 않은 일을 글쓰기가 돕는다. 그래서 나에게는 소중한 일이다.
#02
뭉근하게 끓인 국물 요리는 어떨까. 약한 불에 오래 끓인 것하고 시간을 급히 쓰느라 화학조미료를 넣고 간단히 끓인 것의 차이는 극명하다. 혼자 있는 시간이 불어넣어주는 게 분명 있음을, 이 두 가지를 놓고 비유해본다.
- 이병률 <혼자가 혼자에게>
'혼자의 단단함'을 저렇게 멋진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니! 이병률 시인의 글쓰기가 부럽다. 성숙한 시야로 삶을 아주 가까이 바라보는 그런 글을 쓴다. 공감할 수 있는 문장을 자신만의 문체로 멋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 <혼자가 혼자에게>를 읽으며 책 꼭지를 계속 접다보니 책 두께가 두 배는 더 두꺼워져버렸다. 좋은 문장이 너무나도 많아서.
혼자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십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가는 기로에서, 인간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지점들이 요새 많아졌다. 이제는 예전처럼 재미만을 위해 친구들을 만나는 것은 부담스럽다. 서로가 각자의 일로 바쁘다보니, 그 틈새에서 나온 작은 시간을 더욱 소중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에서겠다. 혼자로 나아가는 것, 더불어 인생은 결국 혼자 살아가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깨닫는 시기, 그 사이에 지금 내가 서 있다. 예전에는 이 문제로 정말 힘들어했지만, 이제는 인정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갔다. 앞으로는 혼자 사는 인생이란 무엇인지, 나만의 정의가 필요할 시기다. 조급함은 금물이다. 48시간 뭉근하게 끓인 돼지국밥 국물에 라면수프를 넣는 참사를 일으키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03
어떤 말은 너무 강력한 의미로 뭉쳐져 있어서 다른 디테일들을 모두 삼켜버려요. '백수'라는 말도 그런 것 같아요. 공부도 하고 창작도 하는 라마님의 다채로운 시간들을 그대로 표현하시길 바라며.
- 밑미 뉴스레터 中 '최창석'님의 답변
최근에 <Bear> 매거진을 읽으면서 뜬금없이 나는 이걸 왜 좋아서 읽고 있는지에 대한 고찰을 했었다.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나는 인터뷰를 좋아해서' 였다. 그럼 인터뷰는 왜 좋을까? 인터뷰는 평소에 '오글거린다'라는 말 때문에 억눌러버리고 마는 사람들의 진지한 모습들을 가감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INFP인 나는 진지한 것들에 관심이 많은데, 인터뷰는 인터뷰이의 내면을 깊게 파고들어 대화를 이끌어내는 콘텐츠이기 떄문에 내 흥미를 자극할 수 있었다.
알간지라는 유튜브 채널을 좋아하는데, 거기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갑분싸'라는 말이 등장하고 나서부터 사람들은 침묵이나 분위기가 싸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였다. 하나의 말이 그 사람의 디테일을 뭉개버릴 때-, 특히 갑분싸나 오글거린다는 표현이 결국 그 사람의 다채로운 모습을 억누르고 말 때,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답답함을 느끼고 살아간다. 알쓸신잡, 트레바리와 같은 콘텐츠가 인기가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일까. 맘껏 나의 진지함과 오글거림을 표출할 수 있는, 그런 장소를 사람들은 은근히 바라고 있다.
#04
우리에겐 필요한 순간에 길을 바꿀 능력이 있다.
- 파울로 코엘료
지금까지 내 삶을 돌아보면 계획대로 된 일은 거의 없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대학에서 일본어를 배우리라는 생각을 못했는데 막상 대학을 가보니 일본어 강의가 전공 과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또 일본어 공부를 시작한 뒤로는 일본어와 관련된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지금은 일본어랑 전혀 관련 없는 마케팅이라는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군대에 가기 전에는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지만 올해 지금까지 나는 72권의 책을 완독했다. 사람은 참 쉽게 변하고 계획은 훨씬 더 빨리 변한다는 것을 체감했다.
돌이켜보면 그런 와중에도 나름 잘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위에서 인용한 파울로 코엘료의 문장이 대신 설명해주는 것 같다. 우리에겐 필요한 순간에 길을 바꿀 능력이 있다는 말. 변화는 항상 찾아오기 마련이고 우리는 크던 작던 변화 자체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삶은 애초에 끝없는 변화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의 과거는 그러한 불연속으로 채워져 있었음을 깨닫는다면, 미래에 대한 부담이 조금은 덜어진다. 앞으로 예측할 수 없는 변화가 찾아오더라도 우리는 그에 맞춰 길을 잘 바꿔나갈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자신감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