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주의 문장수집
#01
자기 스스로도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빈지노 (유튜브 채널 '셀레브' 인터뷰 中)
영감을 받는 사람, 그리고 영감을 주는 사람. 후자의 삶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요새 나는 오로지 영감을 받는 데에만 정신을 쏟고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마케팅 일을 하면서 좋은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레퍼런스를 정신없이 찾아다니고, 선배의 업무 파일에서 노하우를 챙기는 것 모두 영감을 받는 일이었다. 퇴근하고 집에서 책을 읽고 좋은 문장을 노트에 옮겨적고, 유튜브를 보다가 닮고 싶은 사람을 발견하면 링크를 저장해놓는 일까지 모두. 더 나은 사람, 쓸모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나는 스펀지처럼 살았다. 흡수력 좋은 스펀지. 영감들아, 내가 다 흡수할거다!
여느 날처럼 영감 찾기를 위해 유튜브를 뒤적거리던 와중. 예전에 봤던 빈지노의 인터뷰 영상이 추천 영상으로 다시 올라왔고, 오랜만에 또 보고 싶어서 클릭했다. 다시 보니 느낌이 새로웠다. 특히 "자기 스스로도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 문득 이런 고민이 들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일 수 있을까?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받는 것처럼, 나의 행동 혹은 내가 뱉는 단어들이 내 주위 사람들에게 영감의 소재가 될 수 있을까?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물었다. 그러다 결국 마지막 질문에 도달했다. "나는 어떤 사람에게 영감을 받고 있지?" 나는 속으로 '그 사람만의 고유한 색을 가진 사람에게' 라고 답했다. 나 또한 '나 다운' 모습을 보일 때,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오리지널한 나. 영감을 받는 일도 중요하지만, 오늘부터는 나 역시 남들에게도 영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기로 한다.
#02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부쩍 여행이 그리운 요즘이다. 올해 말에는 꼭 혼자라도 겨울 바다를 보고 싶었건만, 코로나 상황이 더 심각해져서 올해의 소망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그렇지만 아쉬움은 가시지 못했으니, <여행의 이유>처럼 여행의 감정을 다시 되새길 수 있는 그런 책들을 찾게 된다. <여행의 이유>에서 멋진 한 구절을 가져와봤다. 여행은 일상의 부재라는 말. '일상에 갇혀버렸다'라는 표현이 딱 걸맞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 예전에는 일상이 지칠 때면 잠시 일상으로부터 훌훌 떠나버리는, 일상의 부재를 경험할 수 있는 '여행'을 맘껏 즐길 수 있었다면, 지금은 일상에 갇혀 꼼짝달싹 못 하기 때문이다. 일상의 무게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이 시기에, 특히 여행이 그립다. 과거와 미래를 온전히 망각한 채 오롯이 현재만을 즐기는 그런 여행. 다시 경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03
좋아하는 게 노를 젓지 않고도 마음이 움직여 바다를 건너 섬에 안착하는 거라면, 사랑하는 건 눈동자에 물감 한 통이 통째로 주입되어 시야와 감정 모두가 그 색으로 물들어 빠지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겠다.
- 이병률, <혼자가 혼자에게>
이병률 작가의 문장, 읽으면서 공감을 많이 했다. 좋아하는 감정은 쉽게 흩어진다. 좋아하는 감정은 나를 움직이게 하지만 나를 막아서는 다른 감정들을 애써 뿌리치려고 하지는 않는다. 흩어졌다 모아졌다 쉽게 반복할 수 있는 그런 감정. 하지만 사랑한다는 것은 시야가 한 색으로 물들어 빠지지 않듯, 다른 감정을 가졌던 기억을 잊어버리게 한다. 싫음, 좋음, 불안, 걱정 등 각기 다른 방향을 추구하던 감정들이 오로지 한 방향으로 쏠리게끔 만들어버린다. 누군가를 참 사랑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쓰는 글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캔버스에 하나의 색만 가득했던, 그 때의 감정으로 지금 다시 가닿아 보려고 해도 불가능할 뿐.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 혼란스러운 요즘, 그 때가 특히 더 그립게 느껴진다.
#04
유혹을 이겨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유혹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오스카 와일드
<알쓸신잡 3>를 보다가 갑자기 등장한 이 문장. 묘하게 설득이 된다. 유혹을 이겨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유혹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니. 유혹을 참느라 쓸데없이 감정을 소비할 바에는 차라리 유혹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감정의 평온을 느끼라는 말일까. 아니면 유혹이란 정말 무서운 감정이라서 인간의 의지로 이것을 온전히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을 돌려 말하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묘하다. 왜냐면 이 문장을 보았을 때 나는 유혹을 참지 못하고 배스킨라빈스 쿼터 한 통을 숟가락으로 우적우적 퍼 먹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 유혹에 못 이길 바에야, 맛있는 엄마는 외계인 먹고 행복해질래! 하면서 그날 한 통을 다 비웠던 기억이 떠올라 웃음이 난다.
#05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커다란 파도 밑을 빠져나갈 때처럼.
- 무라카미 하루키, <일인칭 단수>
살아가면서 모든 과정에서 이유를 찾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 큰 우연으로 가득해서, 절대로 하나의 이유로 하나의 결과를 설명할 수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지독하게 고민이 되는 그런 일은 구태여 이유를 찾지 않으려 한다. 그저 감정이 흘러가게 내비둘 수 있는 용기. 유튜브 <편집자 K>에서 나왔던 말이 떠오르는데, 어떤 감정이든 4일 이상 지속되는 감정은 없으니 지금 가지고 있는 특정한 감정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나를 괴롭히는 감정을 가만히 흘려보내고, 우연으로 가득한 삶 그 자체를 인정하기. 복잡하고 어려운 삶을 되도록이면 쉽게 살아가고 싶은 바램에서 이 문장을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