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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sm Aug 21. 2021

가을 바람과 코스모스

오늘의 순간#4

짤랑-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에 눈과 귀를 빼앗긴다. 이번엔 너가 맞을까, 생각에 닿기도 전에 몸이 굳는다. 어깨를 조금 넘는 생머리, 연보랏빛 원피스는 어김없이 너라는 확신을 주고 있다. 3년이라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너를 바꿔 놓기에는 분명 짧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처음 봤던 그날처럼 넌 하나도 변한 게 없었으니까.



"왔어?"


"응, 오랜만이네."


"아직 보라색 좋아하는구나."


"아. 아니, 그냥 우연이야."



우연이라는 그 말이 다시 한번 나를 굳게 만든다. 우연. 참 우리의 관계를 관통하는 말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그리고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지금까지.

운명이라 믿었던 우리의 순간들은 연속된 우연의 산물이었다.




"서민정 학생?"


"..."


"서민정 학생 없나요?"


"지금 오고 있대요!"



첫날에 지각하는 학생이라 그런지 그 이름은 제법 오래 기억되었다. 거기에 내 옆자리에 앉기까지 했으니, 평생 잊지 못할 운명일 줄 알았다.



"선배님 이쪽 파트는 정리하셨어요? 저는 반대쪽 파트 정리 다 했는데 서로 교환하실래요?"



잘 가꿔진 정원 같은 노트를 볼 때면 너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렇게나 꼼꼼한 사람이 왜 지각을 했을까 싶다가도 나는 끝끝내 물어보지 못했다. 세상의 편견과는 다르게 나는 아직 너무나 순수하고 소심한 사춘기였다. 어떤 색으로도 칠해본 적 없는 내 마음은 하얀 캔버스였고, 어른이 되고 싶었던 소년은 붓을 잡았다. 그렇게 처음 칠한 색은 보라색이었다.

 

영화는 사랑을 활활 타오르는 붉은색이라 가르쳐주었고, 음악은 주홍빛의 머무르는 황혼이 사랑이라 가르쳐주었다. 그렇지만 우리의 사랑은 반짝이고도 깊은 색으로 채워졌다. 우리의 사랑에 꽃이 피어 있다면 나는 나팔꽃이라 믿고 싶었다.


그러나 기쁜 소식이라는 꽃말과는 달리, 우리는 각자의 운명 앞에 굴복해야 했다. 사춘기 소년은 아직 많이 어렸지만 나라를 지켜야 했고, 언제나 당찼던 소녀는 회색빛 세상에 도전해야 했다. 인터넷 게시판의 인기글처럼 우리는 헤어졌고, 드라마의 뻔한 클리셰처럼 자주 가던 카페에서 우리는 다시 마주쳤다. 네가 나를 보고파 그 카페에 왔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보고파 그 카페에 갔었다.

 



"오빤 이번에 복학하는 거야?"


"응, 다음 주엔 기숙사도 들어가"


"잘됐네"


"너는?"


 

뜨거웠던 여름밤은 지나고 우리의 나팔꽃은 다 져버렸지만



"나는 뭐, 그냥 취업준비만 하고 있어. 오랜만에 나온 거야."


"그래... 주말에는 시간 있어?"


"있긴 한데, 왜...?"



우리에겐 또 다른 우연이, 또 다른 시원한 바람과 함께



"괜찮으면 바람이나 쐬러 갈까 해서."


"어디로?"


"코스모스 보러."



우리를 코스모스의 계절로 이끌고 있었다.

.

.

.

.

.

.  

코스모스: 줄기는 한해살이로 전체에 털이 없고, 바로 서서 자라며 많은 가지가 갈라진다. 잎은 마주나고 2~3회 우상이며 조각잎은 선형이다. 꽃말은 '순정'이다.



-우연이 운명이 되는 순간, 끝-


*본 이야기는 허구이며, 작가의 창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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