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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융 Oct 10. 2017

타자에 대한 공포

괜히 도와줘 봤자 오히려 도움당한 여자가 내 빼고 범인으로 몰리는 수가 있다.


인터넷에 혹여라도 행인을 도왔다는 선의에 관련된 글이 올라오면 그 글에 이런 댓글이 달린 것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댓글에는 여성에 대한 혐오뿐만 아니라 자신을 속이는 거짓마저 들어있다. 정말로 누군가를 돕다가 그런 피해를 당한 사람이라면 그 이유가 이해가 갈지도 모르지만, 저런 말을 하는 이들 중 과연 몇이나 누군가를 돕다가 실제로 그런 피해를 당해 봤을까 싶다.


그 이유 때문에 도와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도와주지 않기 위해서 그런 핑계를 만들어 내는 건 아닐까?



사실 모르는 타인에게 정중히 뭔가를 요청하면 대부분은 순순히 들어준다. 심지어 길에서 모르는 타인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면, 대부분은 반갑게 답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터넷 안에서 그리고 실제의 생활 안에서 사람들의 타인에 대한 공포가 만연해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 공포는 이름도 모르는 타인에 대한 이유 없는 분노, 이어서 공격으로 변이된다. 타인이 갑자기 늑대처럼 변해서 나에게 해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타인에게 무언가를 요청하거나 단순히 말을 거는 행위마저도 할 수 없게 만든다.


 좀비에 대한 게임이며 영화가 많이 나왔던 때, 나는 그게 사람들이 가진 타인에 대한 공포와 그로인한 공격 욕구가 발현된 예라 생각했다. 멀쩡한 사람이 아니라 좀비로 변했기 '때문에' 죽일 이유가 생기는 것이다. 더 이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 존재를 죽이는 건 영화 속에서 당연한 일처럼 여겨진다. 타인을 향한 공격 욕구가 마치 정당한 일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러한 공포에 무의식적으로 공감했기에 좀비가 나오는 컨텐츠가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한 번은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지하철 플랫폼으로 향하는 계단을 걸어 내려갔는데, 몸집이 큰 남자가 여자와 아이를 손으로 붙들고 여자를 밀쳐대며 여자의 코 앞에서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여자와 아이는 울고 있었다. 분명 상황이 꽤 지속된 것이 분명한데도, 어느 누구 하나 말리는 이가 없었다.


나는 거의 본능처럼 계단을 내려가서 여자를 내 품에 감싸 안았다. 여자가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고, 아이는 중간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남자가 하는 말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남자가 등에 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가방을 메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가족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남자는 내 행동에도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여자의 앞을 막아섰지만 그는 대신에 내 얼굴에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겁이 났다.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누구도 도와주는 이가 없었다. 내가 아는 포르투갈어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남자에게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별다른 단어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렵게 어렵게 두 단어를 생각해냈다. 우리말로 진정하다 라는 의미의 ‘카르마’와 딸이라는 뜻의 ‘필랴’.

나는 “카르마 파라 필랴” 하고 반복해 그에게 말했다. 딸을 위해 진정하라는 뜻이었다.


그는 내 말을 듣고는 잠시 진정하는 듯싶더니 곧 다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내 얼굴로 쏟아지는 침들 사이로 그의 목젖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성대가 걱정될 지경이었다. 그때 작은 체구의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 다가와 남자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그와 내가 끼어드니, 그때서야 사람들이 원을 그리고 몰려들어 너도나도 남자에게 무어라 말을 했다.


그 사이 지하철이 들어왔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하철을 타고 떠났다. 청년은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경찰에 전화를 하는 것 같았다. 남자는 소리 지르는 것을 잠시도 멈추지 않고 있었고, 여자의 감정은 있는 대로 격앙되어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어서 어쩔 줄 몰라하던 아이가 울기 시작했고, 여자가 그런 아이에게 울지 말라고 화를 냈다.



그의 괴성은,

건장한 체격의 경찰 앞에서 마법처럼 그쳤다.

누가 마술봉이라도 휘두른 것 같았다.


경찰은 별 말도 없었지만, 그는 갑자기 반성하는 태도로 경찰과 함께 사라져 갔다.





 남겨진 여자와 아이에게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때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어서, 나는 말 대신 작은 사탕을 아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아이의 눈을 맞추고 아이에게 괜찮다는 듯 웃어 뵈니, 그때서야 아이가 나에게 웃음 지었다.


이럴 때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오고 가는 것이 있다. 아이와 내가 주고받은 웃음 사이에는 보통의 상황에서 주고받을 수 없는 솔직한 감정이 담겨있다. ‘I know you are there. Know that I am here’.‘네가 거기에 있음을 나는 안다. 내가 이곳에 있음을 알아라’. 그런 말무언에 오고 가는 것만 같다.




그런가 하면, 나에게는 두고두고 후회되는 일도 있다.


몇 년 전, 프랑스 아비뇽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때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비뇽 축제 기간이라서 아비뇽 중심가의 숙소가 모두 예약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미처 숙소를 예약하지 못한 내게 두 가지 선택이 있었는데, 하나는 정말 비싼 호텔을 가거나, 아니면 중심지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숙소를 잡고, 버스를 타고 왔다 갔다 하는 거였다. 당연히 돈이 없었던 나는 후자를 선택했고, 내가 예약한 숙소가 비교적 우범지역에 위치했다는 것은 나중이 돼서야 알 수 있었다.


내가 머물고 있는 방의 옆 호실에는 중국에서 온 커플이 묵고 있었다. 말 한번 해 본 적 없지만, 짐작하기로는 신혼부부 같았는데, 손에는 항상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나와 똑같이 그들도 매일 아침 버스를 탔다. 나는 아침의 버스 정류장에서 심심치 않게 그들을 마주치곤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숙소를 조금 걸으면 나오는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었다. 얼마 안 있어서 그 근처에 살고 있는 라틴계 여성이 옆으로 와 앉았다. 거의 동시에 그 중국인 커플이 버스정류장 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벤치에 앉는 대신 서 있는 것을 택했다. 십 분 정도 지나니 또 누군가 도착했다. 기껏해야 열일곱 열여덟 로보이는 청년 한 명이 버스 정류장에 기대어 섰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는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가 불안해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그 청년이 중국인 커플을 향해 돌진하더니 순식간에 카메라와 가방을 뺏어 도망가려고 했다. 커플이 뺏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아스팔트 도로로 끌려가 넘어졌다. 그들은 도로 한복판에서 가방을 뺏기지 않으려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그 청년과 비슷한 나이 또래의 다른 청년이 오더니 중국인 커플을 마구잡이로 때리기 시작했다.

 먼저의 청년과 같은 무리인 것 같았다. 그래도 중국인 커플은 가방과 카메라케이스를 놓지 않았다. 커플 중 여자가 헬프 미, 헬프미! 하며 계속 도와 달라고 소리쳤다. 나는 몸이 잔뜩 얼었다. 처음 당하는 폭력적인 상황에 대해 어떻게 끼어들어야 할지 몰랐다. 내 옆에 앉은 여자도 어쩔 줄 모른다는 듯 내 얼굴과 도로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 몇십 초의 시간이 찰나처럼 느껴졌다. 도로에 차를 몰고 오던 중년의 아저씨가 차에서 내려 서자 도둑들은 물건들을 포기하고 도망가버렸다.


나는 도둑들이 간 이후에도 그들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나 자신이 너무나 창피했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창피한 경험이었다. 당연하게도, 중국인 커플은 그날 일정을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나는 버스를 타고 중심가로 갔지만, 마음이 어수선해 무엇도 할 수 없었다. 마음이 말할 수 없이 무거웠다.



그들은 바로 그다음 날 숙소를 떠나 다른 곳으로 여행하기로 결정했다. 숙소 주인이 그들이 당한 일을 듣고는 차를 태워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나는 주인에게 내가 혹시 동행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숙소 주인이 괜찮다고 했기에 나는 기차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그들에게 마침내 말을 건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어려운지…


누가 목구멍을 마개로 막아 버린 것처럼 그들에게 향하는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이십 여분을 가만히 있던 나는, 기차역이 창문 밖으로 보이기 시작하자, 그때서야 고개도 들지 못한 채로 간신히 말을 할 수 있었다.


“그 날 도와주지 못해서 너무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들이 곧 이해한다고 말했지만, 숙여진 고개가 쉽사리 들려지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 이 사건은 내가 아는 가장 창피한 기억 중 하나다. 내 이름이, 내 자아가 창피한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내 존재 자체가 창피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또 언제, 어떤 상황에 도와주어야 하나, 라는 문제에 직면할 때가 있다. 나의 선의가 그 사람에겐 오지랖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거기다가 가끔은, 아니 많은 순간 무섭기도 하다. 특히나 폭력적인 상황에 갑자기 끼어들을 때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남자인 상대방이 완력으로 여자인 나에게 해를 가하고자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폭력적인 상황에서는 최대한 대안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그게 유효하지 않을 때도 있다. 혹은 몸이 먼저 나가는 때도 있다.


 그렇지만 정말 확실한 건, 누군가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혹은 누군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 ‘같은데’, ‘확실하지 않다’고 말을 건네볼 생각도 없이 다시 등을 돌리는 일이 생긴다면, 나 자신에 대한 창피함은 뼈 깊은 곳까지 심어질 것이다. 내가 아비뇽에서 겪은, 내가 인간임을 내 자신이 배신한 듯했던 그 기분은 다시 느끼고 싶지 않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한다.


 인간에 대한 불신이 만연한 이 때, 인간 존재에 대한 믿음을 조금이라도 쌓아 올릴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실제로 마주하는 상대를 향하는 말과 행 안에 있는 게 아닐까? 뉴스에 나오는, ‘어떻게 저럴 수 있나. 끔찍하다’라고 느껴지는 하나의 사건이 우리에게 이 정도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면, 마찬가지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어느 날 진심으로 행하는 선의가 미칠 수 있는 영향도 그만큼 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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