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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융 Oct 18. 2017

나는 태어날 때 무엇을 가지고 왔나

외국 생활을 시작하고 처음 일 년 동안 나에게는 한국 사람과 마주하고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다. 앞선 글 '입술이 조용히 머무르는 곳'에서 언급하였다시피, 내가 살던 곳은 이태리 토스카니의 조그만 마을이었고 동양인이라고 해도 중국인 세명과 대만인 한 명이 전부였다. 아무런 연고 없이 그곳에 정착하게 된 나에게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당장 말하는 언어도 달랐고, 인사하는 방식, 밥을 먹는 방식도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특히 처음에는 인사를 해야 할 상황이 오면 대체 왼쪽 뺨부터 키스를 해야 하는지, 키스는 두 번인지 한 번인지 알 수가 없어서 누군가와 인사를 하는 게 꺼려질 정도였다. 언제 한 번은 멀리서 아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게 됐는데, 일부로 인사하기가 싫어서 돌아갔던 적도 있었다. 그때의 기분은, 뭐라 할까. 마치 내가 하는 모든 것이 틀린 것이며, 내 온 존재를 부인당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외로웠다. 한국인과 마주 보고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소원이 더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공연을 하러 가게 된 폴란드에서 객석에 한국인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그녀는 삼십 대 중반의 여성으로, 폴란드인을 만나 결혼을 하고 폴란드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가 먼저 저녁식사를 하지 않겠냐고 말해왔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다음날 저녁 그녀와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사실 그날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연극에 대해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면서 참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내 소원을 이뤘는데, 기뻐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기쁘지도 않았고 오히려 허전한 기분이었다. 왜일까. 숙소에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한국인과의 만남에서 뭘 얻고 싶어 했던 걸까?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에는 그런 말이 나온다. 

"우리는 심지어 그 '진짜 삶'이라는 게 지금 어디 살고 있는지, 아니면 그게 뭔지,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다. 우리를 내버려둬 보아라, 책들 없이! 우리는 바로 혼란에 빠지고 길을 잃어버릴 것이다. 우리가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 어디에 충성을 바쳐야 하는지, 뭘 사랑하고, 뭘 증오하는지, 뭘 존경하고, 뭘 경멸해야 하는지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심지어 우리 자신의 피와 살을 가진 '인간 존재'가 되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존재 안에는 별별 것들이 다 들어간다. 우리의 지식, 우리의 버릇, 우리의 학력과 연봉, 우리의 말하는 방식과 옷을 입는 방식까지. 그리고 그게 부정당할 때 우리는 심한 모욕감을 얻는다. 그게 우리 자신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마치 한국인을 만나면 내 존재가 확인될 거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내가 아는 것들이 맞는 것임을, 그리하여 내 존재 또한 괜찮을 것임을 확인받고자 했던 것이다. 


나에겐 그 당시 베누아라는 이름의 남자 친구가 있었다. 내가 파티에 가게 될 때마다 옷을 입고 그에게 뭐가 더 괜찮냐고 물어볼 때면, 그는 "모른다" 거나 "아무거나 입어도 된다"라는 말을 하곤 했다. 한두 번은 그냥 넘어가지만 그런 대답이 세 번이 되고 네 번이 되니까 어느 날은 화가 났다. 나는 결국 얼굴을 붉히고는 "내가 입는 옷도 나의 일부분이니 잘 보아달라"라고 말했다. 그가 내 말을 듣고는 단호히 대답했다. 


"아니야."


대체 뭐가 아니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더 화가 나서 그에게 따지니, 그제야 그가 말했다.


"너는 네가 입고 있거나 입고자 하는 옷에 없어. 네 존재는 그보다 훨씬 깊고 큰 존재야."


누구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나의 친구들도 의례 이런 상황이면 자기가 더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골라주었고, 나의 가족도 내가 예쁜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을 하기를 원했다. 나도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자라왔다. 남 앞에서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생각은 어느새인가부터 나에게 나의 '일부분'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옷을 고르면서 무엇이 더 예쁜지 고민하고, 이 인사법이 옳은가 그른가를 계속해서 질문하는 동안 나는 나 자신을 오히려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엉뚱한 곳에서 나 자신을 찾고 있었다. 


이 옷에도, 저 옷에도 나는 없다. 마찬가지로 뺨에 키스를 하는 인사법에도, 허리를 숙여하는 인사법에도 나는 없다. 나는 그런 형식이나 형태에 제한될 수 없는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태어날 때 무엇을 가지고 왔는가. 

그런 생각을 해본다. 


아무런 옷도 걸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지식과, 나의 버릇, 나의 재산, 나의 학벌도 내가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게 아니다. 몸뚱이만을 가지고 태어난 것 같지만, 태어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어머니의 자궁 밖으로 나온 순간이 내가 존재하게 된 순간일까? 아니면 임신이 된 그 순간? 아니면 엄마와 아빠의 몸속에 나뉘어 있던 순간? 그 전? 


그리고 나중에 내가 다시 가지고 갈 것은 뭘까? 계속해서 나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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