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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융 Sep 27. 2017

입술이 조용히 머무르는 곳에

가슴은 천 개의 꽃을 가진다


내가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날 당시, 나는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처음 혼자 가보는 여행은 나름대로 겁이 없다고 자부했던 나에게도 떨리는 일이어서, 알던 영어 단어도 마치 까먹은 듯,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처음으로 공항에서 내려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던 것을 기억한다. 밖으로 펼쳐지던 그 생경한 풍경… ‘진짜 이제는 혼자구나’ 하는 느낌에 긴장으로 온몸에 근육이 굳어 있던 나. 


 영어를 못하면 바디 랭귀지라도 뭐 자신감 있게 좀 표현하고 해야 할 텐데, 그때의 나는 자의식이 너무 강했던 아이여서 그 바디 랭귀지도 잘 활용하지 못했다. 습관이라는 것이 참 무서운 것이다. 아무도, 길을 지나쳐 가는 이들 중 누구도 나를 모를 텐데, 마치 모두가 나를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손짓, 발짓하는 것도 왠지 부끄러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많은 것들 것 얽매여 있었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쫓고 있었던 것 같다. 바디 랭귀지라는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자의식을 버리지 않으면 그것도 쉽지가 않은 것처럼 여겨진다. 사실 자의식이라는 것은 듣지 않으면서도 말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을 때, 말하자면, 누군가 말을 할 때, 듣고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이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자라난다. 나는 그때 내가 영어를 못한다는 사실이 괜히 창피해서 누군가 말을 하고 있을 때도, 내가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지 또는 어떤 영어 단어를 써야 하는지에만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어쨌든 그즈음 나는 정말 가고 싶었던 국제적인 극단에서 두 달간 열리는 오디션에 참여했고, 결국 합격하여 정식으로 극 단원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그때도 나는 영어를 잘 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종종 그런데 대체 어떻게 오디션에 합격했냐고 물어보는데, 나는 오디션 때 주어진 영어 대사를 하며, 새타령을 불렀다. 음악이라는 것이 하나의 언어라는 것이 그저 말뿐만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진정으로 느꼈다. 침묵노래는 우리가 말로 표현하는 것 이상을 담고 있다. 그렇다고 언어의 힘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가끔 나는 언어가 빛이 바랜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언어가 너무나 막 쓰여져서 그 안의 진정한 의미를 더 이상 들려주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입으로, 가슴으로 머금으면, 단어 하나하나, 음절 하나하나에 그에 속하는 떨림과 울림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들을 충분히 담지 않고 입술에서 내뱉어버린다. 그래서 언어는 그 의미를 많이 잃어버렸다.


 극단에 들어가고 나서 처음 육 개월간은 극단의 미팅이나 작업을 따라가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특히나 영어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프랑스어도 사용하고 있어서, 영어도 그때서야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한 나에게, 오고 가는 말들을 이해하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처음에는 정말 화가 났다. ‘대체 왜 내가 영어를 잘 못하는 걸 알면서 프랑스어로 이야기하고, 왜 저렇게 빠르게 이야기하는 걸까.’ 극단의 스튜디오가 위치한 곳은 토스카니의 작은 마을로, 한국인이라곤 단 한 명도 없었으며, 동양인은 그것도 옆 마을에 사는 중국에서 온 3인 가족이 다였다. 내 언어로 이야기할 상대도 없었고, 모든 환경이 갑작스레 바뀌니 내 우울감은 매일매일 더해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포기하게 됐다. 

 언어를 알아듣는 것에 기를 쓰는 것을 포기했다. 그 대신, 나는 누군가가 말을 할 때 그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거기엔 수많은 것들이 살아 있었다. 사람의 얼굴에는 수많은 감정들과 생각들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가끔은 그냥,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사람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도, 그 감정이 너무나 크게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때가 많았다. 슬픔이 아니었다. 그 사람을 들여다본 게 아니라, 마치 그 사람의 생명을 들여다본 것만 같았다. 그것에 벅차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럴 때면 상대방도 내가 이해했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언어를 이해하려 기를 쓸 때는 하지 못하던 것을, 단순히 언어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니 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만남’이었다. 그때, 나는 어렴풋이 느끼던 ‘진정으로 만난다는 것’이 뭔지 처음 깨달았다.


 그건 혼자 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가끔 우리가 아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 사람의 표정, 행동, 말투.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느낄 때, 나는 그 사람이 내 안에 살아 있음을 느낀다. 가끔 내 얼굴이 마치 그 사람의 얼굴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심지어 내가 하는 행동이 그 사람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같이 웃게 되는 것도, 지하철의 어린아이와 엄마가 서로를 향해 사랑을 말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입가에 머무르는 것 또한 마찬가지의 일이다. 

 그 순간, 그 사람이 내 안에 들어와 사는 것이다. 


 2년 전, 말레이시아의 사바라는 지역에 머물며 농가의 일을 도와준 적이 있다. 나는 내가 지내던 농장의 농부인 칼리드의 초대를 받아 무슬림 가족인 칼리드, 아웅, 피에나의 집에서 머무르게 됐는데, 피에나는 영어를 잘 하지 못했다. 한 단어, 한 단어를 끊어 이야기했는데, 그럴 때면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았다. 내가 잘 알아들을 때는 피에나가 자신의 언어 말레이로 거침없이 이야기할 때, 그리고 내가 그런 피에나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나와 피에나는 사실 서로 간 언어로 소통은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 우리는 정말 좋은 친구가 되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와서 언어 문제로 말하기를 주저할 때, 피에나가 말했다. Min understand. 당신이 말하면 민이 알아서 이해할 거란 이야기였다. 


 피에나는 보수적인 무슬림 집안의 첫째 며느리였는데, 열 명 남짓 하는 식구의 매 식사를 챙기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모두 혼자 맡아했다. 열일곱 때 시집을 왔는데, 이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녀는 친정어머니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녀의 집은 다른 이웃들의 집과 떨어져 있어서 주변에 친구도 없었다. 그녀와 두 달 동안 소통하면서 그녀와 나는 참 많이 울고 웃었다. 어린 소꿉친구들처럼 서로에게 화장을 해주고, 서로의 옷을 빌려 입어보고, 같이 요리를 했다. 그녀에겐 갓 낳은 아들 ‘다니’가 있었는데, 울음이 참 많던 아이에게 내가 가서 노래를 하면,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울음을 뚝 그치곤 했다. 그녀는 곧 내 친구가 됐다.

 

 내 또 다른 친구인 태국의 타 또한 나와 언어를 이용하지 않고 소통하는 나의 소중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일흔 정도의 나이로, 태국에서는 나이가 많은 남자의 이름 앞에 룽을 붙이기 때문에, 나는 그를 항상 룽-타 라고 부른다.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느껴진다. 내가 웃고 있으면, 그도 웃고, 그가 울상을 지으면, 나는 걱정된다. 그가 어느 날 나와 같이 밥을 먹는 중에 나를 부르더니, 손바닥을 자신의 가슴 앞에 동그랗게 그렸다. 내 눈을 들여다보던 그가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곧 나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똑같이 대답해 주었다. 아마 이 소통은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소통 중의 하나일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페르시아의 시인 루미의 시 중에 그런 구절이 있다. “입술이 조용히 머무르는 곳에서, 가슴은 천 개의 혀를 가진다.” 

 

 가끔 나는 ‘인간에게 언어가 없으면 세상이 이보다는 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하곤 한다. 사실 중요한 것은 언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것이리라. 나는 우리가 한 단어,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꽃을 피우듯 듣는 이에게 향기를 전달했으면 하고 꿈꾼다. 하지만 우리 안에서 그런 꽃을 피우려면 먼저 우리 깊은 곳에 존재하는 그 씨앗에 물을 주고, 따뜻한 햇빛으로 감싸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루미의 시에는 또 그런 구절이 있다. “만약 할 수 있다면, 단어를 사용하지 말고 그 의미를 말해보라. 단어 없이 말해 보라. 그리하여 가슴이 대신 그것을 말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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