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융 Sep 26. 2017

돌아오기 위해 떠나오다

나 자신에게로,

내가 경험한 최초의 모험은 지하철 1호선에서 일어났다. 내가 모험을 ‘향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모험이 ‘일어났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고민했다. ‘나는 왜 이곳에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 


 물론 답을 주는 이들은 없었다. 부모님이던, 선생님들이던 마치 그 고민은 할 필요도 없다는 듯 살아가고 있었다. 오히려 너는 어린 애가 무슨 그런 질문을 하냐고 비웃음을 사거나 타박 받기 일수였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의 부재로 나는 심한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다. 어느 때는 그 물음이 머리 속에 가득 차서 잠에 들 수 조차 없었다. 그 커다란 질문 앞에서 학교에 다니는 일은 나에게 당연하게도 무의미한 일처럼 느껴졌고, 나는 언젠가부터 다니고 있던 중학교를 자주 결석하게 되었다.


 내가 학교를 결석하고 하는 일이란 사실 별 게 없었다. 집 앞의 공원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하루 종일 개미의 움직임을 관찰하거나, 버스나 전철을 타고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이 그 전부였다. 나는 그때 개미가 사람이 앉듯이 등을 구부리고 앉아 쉴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개미들은 바쁘게 움직였고,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의미 없이 보였다. 하지만 개미들의 그런 무의미한 움직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버스나 전철에 앉아 종점으로 향하고 있을 때 난 저마다의 인간상을 볼 수 있었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아침부터 기분이 안 좋은지 인상을 마구 찌푸리고 있는 사람들, 큰 소리로 왠지 모르게 욕을 하는 사람까지. 마찬가지로 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전철 안에 똑같은 자세로 앉거나 일어서서 저마다의 생각이나 핸드폰 혹은 신문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참 재미있게 느껴졌다. 가끔 출근길에 질서 있게 줄지어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들을 보면, 인간과 개미는 참 다르지 않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 날 지하철 종점에 도착 했을 때, 나는 다시 출발하기를 기다리며 지하철 한 구석에 앉아 있었다. 교복을 입은 채였고, 막 오전 열 한시를 향해가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하얀 블라우스에 양복바지를 입은 남자가 다른 칸으로부터 걸어 오더니 내 앞에 멈춰 서서는 나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내가 그때 무슨 생각으로 따라갔는지는 모르겠다. 아저씨가 망설임 없이 전철 안을 휘적휘적 걸어갔다. 내가 따라갔고, 도착한 곳은 맨 끝 칸이었다. 


아저씨는 끝 칸의 조그만 문을 열더니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나에게 손짓했다. 들어오라는 표시인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레 들어갔고, 내가 도착한 그곳은 지하철 조종실이었다. 아저씨가 말없이 벽에 붙은 간이 의자를 펴 주며 의자에 앉았고, 나도 얼떨결에 따라서 간이 의자 위에 앉았다. 교복을 입고 그 시간에 학교 밖에 나와 있는 나에게 ‘여기서 뭐하냐’고 물어볼 법도 한데, 아저씨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할 일을 하면서, 지하철을 운영하면서 생기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거나, 가끔 내가 물어보는 질문들에 답 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저씨만의 배려였던 것 같다. 그 시간에 교복을 입고 혼자 앉아 있는 아이에게, 그저 아저씨는 무언가 해 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 본 지하철 조종실은 참 신기했다.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나에게 그 기억은 마치 내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 언젠가 꿈꾸는 중 봤던 하나의 장면인 양 느껴진다. 유리창이 참 넓었고, 조종하는 기계는 신기했다. 지하철 칸에서 볼 때는 터널 안이 그저 캄캄하게 느껴지지만, 조종실에서 보니 그 터널 안에 붙어 있는 별거 아닌 야광 스티커, 철로, 그 모든 것이 특별하게 보였다. 전철이 터널에서 빠져 나와서 한강을 지날 때의 광경은 더욱 특별했다. 그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 동안 내 눈 앞에 보이는 모든 풍경들이 마치 처음 보는 풍경인 양, 다시는 보지 못할 풍경인 양 느껴졌다. 단지 보는 창이 넓어졌으며, 보는 방향이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나는, 그 순간 비로소 그 장소를 ‘발견’했다.


 법정 스님의 잠언집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 하라’ 중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가 산속으로 들어가 수도하는 것은 

사람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발견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다.

우리가 사람들을 떠나는 것은

그들과 관계를 끊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그 길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한국을 떠나 떠돌기 시작하고, 해 수로 이제 6년째에 접어든다. 올해 들어, 내가 왜 그토록 떠나고 싶어 했고, 같은 자리를 벗어나야만 했는가에 대한 답이 어렴풋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돌아오기 위해’ 떠난 것이다. 돌아와서 발견하고, 진정으로 만나기 위해, 진정으로 살아가기 위해 여행한 것이다. 


 지하철 밖의 그 풍경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나는 언제나 그 풍경을 지나쳤지만 진정으로 본 적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사실 모든 것은 아득히 먼 ‘그곳’에 있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내가 있던 곳, 여기에서 떠나야만 했다.  


 내가 좋아하는 말 중에 ‘돌아가셨다’라는 말이 있다. 돌아가셨다. 나에겐 태어난 곳으로, 있어야 할 곳으로, 나 자신으로 돌아갔다는 말처럼 들린다. 돌아가셨다.. 우리도 사실 돌아가기 위해 이 곳에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현재 진행 중인 나의, 그리고 당신의 ‘돌아가는 여정’을 쓰고자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입술이 조용히 머무르는 곳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