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 그 자체는 무죄이다
나는 이태리의 토스카니 작은 마을인 La rotta라는 곳에서 극단 생활을 하며 이년 반을 살았었는데, 내가 맨 처음 이주해 살던 곳은 인적이 드문 숲길에 지어진 집이었다.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슈퍼마켓이라 하면, 30분을 걸어야 나오는 Alimentari라는 아주 조그만 가게 하나가 있었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씩 집에서 요리할 야채와 쌀, 파스타 등을 살 때가 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버스를 타고 도시 중심가로 향해야 했다. 가장 가까운 큰 마트는 Panorama 파노라마라고 불리는 마트였는데, 30분을 걸어서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다음, 두 시간에 한 번씩 오는 버스를 잡아탄 후, 또다시 30분을 버스로 가야 하는 거리에 위치해있었다. 나중에는 집도 그나마 가까운 곳으로 옮기고, 자전거도 사면서 버스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지만, 처음에는 걷거나 그것도 아니면 당시 나의 극단 동료이자 연인이었던 베누아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베누아는 슈퍼마켓에 가는 걸 정말 싫어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이 많은 도시 혹은 건물에 머물러야 하는 것에 그는 강한 거부감을 가졌다. “그런 곳에서는 너무나 많은 정보들이 오가서 그 무엇 하나 제대로 담을 수가 없다.” 고 그가 말했다. 나는 처음에 파노라마에 가는 것에 대해 별 느낌이 없었다. 특별히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말하면 말할수록 파노라마에 가거나 도시 생활을 즐기러 가는 것이 왠지 좋지 않은 일처럼 여겨졌다. 결국에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는 너무나 많은 정보들이 오가서 그 무엇 하나 제대로 담을 수가 없다.” 나는 그런 데에 가기 싫다. 그땐 정말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그런 발상 자체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된 건, 어느 오후 파노라마에서 나 혼자 쇼핑을 하고 있을 때였다. 마트는 비교적 한산했고, 나는 야채가 놓인 박스들에서 토마토 몇 개를 집어 봉지에 담고 있었다. 그때 내 바로 맞은편에 한 여자가 걸어오더니 마찬가지로 야채를 고르기 시작했다. 그 옆에 여자의 아들로 여섯 살 남짓의 조그만 남자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카트를 질질 끌고 다니고 있었는데, 잠시 후 내가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짓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카트 안에 담긴 것들을 보았는데, 파스타, 파스타 소스, 각종 야채들이 거기 놓여 있었다. 그 여자는 가족이 먹을 식료품들을 사고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어쨌건 저쨌건 우리 둘 다 ‘살기 위해서’ 그곳에 오게 된 거였다. 물리적인 여자의 몸 덩어리만 그곳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여자의 아들, 여자가 그곳에 오기 위해 들인 시간, 거기 존재하지 않는 여자의 남편, 여자와 그 가족이 식료품을 가지고 생활할 몇 주의 시간, 음식을 먹을 때의 감각과 감정, 그 모든 것이 같이 존재하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다음부턴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기분이 나쁘거나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많은 사람들은 삶을 일구 기 위해서 그곳에 온 것이다. 내가 그 공간 안에서 단지 물리적 몸 덩어리로 느꼈던 사람들은 사실 생명을 담고 있었다.
가끔 사람들이 가득한 출근길이나 퇴근길에도 그런 짜증이 나게 마련이다. 그럴 때면 나는 생각한다. 이 한 사람, 한 사람은 나를 덥게 만들고 답답하게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있는 ‘몸 덩어리’들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의 삶을 일구기 위해 이곳에 도착한 존재들이라고.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위험한 생각 중 하나는 내가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만이 진리이다.’라는 착각이다. 특히 남들과 달라지고자 하는 이들, 별난 인생을 사는 이들은 이러한 낡은 생각의 버릇에 빠지기 더욱 쉽다. 사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평범해지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특별해진다는 말은 남들과 달라진다는 말과 상통한다. 남들과 달라지겠다는 다짐은 그 속에 폭력을 내포한다. 흔히 우리는 폭력이라 하면 누군가에게 가해지는 신체적, 언어적 상해를 떠올리는데, ‘나는 너보다 더 낫다.’ ‘나는 이렇고 넌 저렇다’ 라며 분리하는 그 마음속에도 폭력은 존재한다.
자, 생각해 보자. 누군가가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두고 ‘그런 옷을 왜 입어?’ 혹은 ‘그런 사람을 왜 만나니?’하고 말하면 우리는 상처를 받게 될 것이다. 상대방은 ‘그런 옷, 그런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문장 속에는 그것을 좋아하는 당신에 대한 판단도 담겨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런 곳에서는 너무나 많은 정보들이 오가서 그 무엇 하나 제대로 담을 수가 없다.”라는 말속에는 ‘그런 곳’에 가는 사람들에 대한 폭력을 내포하고 있다.
확실히 특별한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우리는 무명의 가수를 좋아하다가 그 가수가 유명해지는 순간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들을 전해 듣는다. 그 가수의 음악 속에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도 말이다. 소수가 다수가 되는 순간, 특별한 것이 보통의 것이 되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그것에 흥미를 잃는 것이다.
베누아는 ‘그런 곳’이라는 말로써 그곳에 가는 나와 일반 사람들에서 스스로를 배제했고, 그럼으로써 특별해졌다. 소수를 좋아한다는 것은, 나아가 소수가 된다는 것은 특별한 기분을 준다. 하지만 또한 소수를 좋아하는 것, 소수가 되는 것은 힘들다. 소수 앞에는 다수가 있고 그 소수가 ‘자신이 믿는 진리를’ 다수에게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 그 때문에 소수는 그 어려움 속에서 고통을 겪는다. 우리는 결국 그 고통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다른 인간들”이라는 우월감으로 소화를 하고 만다. 일종의 자기 위안인 셈이다.
이 세상의 많은 구루들이 현대 문명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내놓는다.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기차를 현대 문명의 상징이라고 표현하며, 기차가 시간관념을 엄격하게 만들어 현대인들을 제도에 얽매이게 만든다고 꼬집었다. 당장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아니고 내 가까운 지인들만 해도, 게임 자체를 한심한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진리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꼭 요가를 해야 하거나 명상에 몰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흙에 손을 대고 일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인생에 대해서 모른다는 듯한 말과 행동을 하는 청년도 있다.
하지만 기차와, 게임, 슈퍼마켓 그 자체에는 잘못이 없다. 그것들을 이용하는 우리의 태도가 잘못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요가와 명상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 흙에 손을 대고 일해 보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에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 사실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가 잘못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진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게임 속에서, 기차 안에서, 노래방의 반주 속에서, 요가 대신 살사 댄스를 즐겨 추는 사람 속에서, 심지어는 파노라마 속에서도 살아 숨 쉬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한 진리의 다양한 표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