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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융 Sep 28. 2017

꼬꼬댁으로 배운 사랑

루시아와 퀴테리아

내가 머물던 브라질 상파울루에 위치한 레지던시의 설립자인 빅터와 에두아르도는 2년 전부터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예술가가 맘껏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며, 산 한가운데에 작업실을 만들고, 생활공간을 만들고, 심지어 밭을 매기 시작했다. 그들은 레지던시를 나무의 이름과 같은 SAMAUMA라고 이름 붙였다. 


 밭을 매기 시작한 이후부터 그들은 닭을 기르는 걸 꿈꿔왔고, 결국 어느 날 빅터가 열 마리의 닭을 사다가 레지던시에 풀어놓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바로 그 다음 주, 먹을 게 없을까 기웃대던 동네 들개에 아홉 마리가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그 남은 한 마리가 퀴테리아였다. 


 퀴테리아는 오골계였는데, 털이 까맣고 몸집이 컸다. 닭장 문을 열어 놨지만 퀴테리아는 들개가 다른 닭들을 죽인 이후 트라우마 때문인지 닭장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나는 덕분에 퀴테리아가 있다는 걸 몇 달 동안이나 모르고 지냈다. 내가 마침내 닭장에 죽은 듯 누워있는 퀴테리아를 발견했을 때, 퀴테리아의 우울증은 중증이었다. 아무리 건드려도 미동도 없던 그녀를 위해 우리는 친구를 데려오기로 했다. 곧 빅터가 닭 한 마리와 그 닭의 새끼 병아리 네 마리를 데려왔다. 우리는 닭들을 물어 죽인 들개가 다시 올까 두려웠기에, 닭들의 집을 닭장이 잘 보완될 며칠 동안만 큰 박스 안에 마련하기로 했다. 우리는 새로 온 닭의 이름을 루시아로 지었다. 루시아는 새끼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네 마리 병아리들은 너무나 작았다. 내가 어릴 때 학교 앞에서 팔던 병아리를 연상시켰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이 병아리들은 자연 속에서 태어나 밭으로, 숲으로 마구 돌아다니는, 말 그대로 자연 방생을 실천하고 있는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루시아가 나를 쪼려고 쫓아왔다. 닭이 들어가 있는 박스의 문이 바람이 불면서 닫혔는데, 그 문을 닭이 나오기 쉽게 더 벌려 주려고 한 직후였다. 테라스를 청소하던 내가 박스를 발견하고 문에 손을 뻗었는데, 루시아는 만만찮게 목을 세우며 부리로 내 손등을 자꾸 쪼려고 했다. 요리조리 피하며 가까스로 문을 열고 다시 테라스로 돌아서는데, 뒤에서 조그맣게 발소리가 쫓아오는 게 들렸다. 타닥타닥, 뒤를 돌아봤는데, 닭이, 내가 날지 못한다고 알고 있던 그 닭이, 내 허리춤까지 날더니 나를 쪼려고 고개를 쭈욱 뺐던 것이다! 나는 들고 있던 빗자루로 간신히 루시아의 공격을 막아 내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나니 곧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도와주려고 했는데, 나를 쪼려고 하다니! 그러다 이내 닭이 새끼들을 돌보고 있단 사실을 기억해냈다. 우리는 주변의 들개들이 와서 닭을 잡아먹을까 봐 닭을 박스 안에 넣어 놓았지만, 닭은 그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을 거다. 영문도 모른 채 비좁은 상자 안에 갇혀 있기 싫었겠지. 내가 가까이 다가와 문을 열 때에도 닭은 조심성 없이 다가와 문을 건드리는 내가 무서웠을 터였다.  


 내가 이해하는 것이 닭의 머릿속에는 없다. 그렇기에 닭은 자꾸만 나를 쫀다. 마찬가지로 나도 이렇게 짐작하지만 닭이 왜 나를 쪼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서로가 잘못된 이해 속에서 서로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간이란 존재만큼 참 어리석은 존재가 없다. 가끔 우리가 ‘마그리사’라고 이름을 붙여준 떠돌이 개가 음식을 달라며 찾아오는데, 사람들이 다가가서 사료를 주며 ‘앉아!’ ‘앉아!’하고 명령한다. 그러고는 마그리사가 앉지 않으면 인간의 언어로 무어라 무어라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래… 마그리사, 너 왜 앉아 안 하니. 착하게 굴어야지, 너 다 알아듣잖아. 알아듣는 거 알아…” 


우리는 마그리사가 앉지 않는 것을 보고, 마그리사의 능력이 떨어지는 거고, 그가 말을 단지 듣지 않는 거라고 생각한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사실 우리 또한 마그리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지는 거고, 우리가 마그리사의 말을 듣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이해는 두 방향이다. 

 그것이 단지 언어가 통하지 않는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 해당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장에 나와 내 옆에 앉은 친구와의 관계부터 시작해서, 연인들의 관계, 부모 자식과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이해의 부재를 찾을 수 있다. 


부모는 자식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자식은 부모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방법에서 서로를 비켜나가고 엇갈린다. 서로를 이해하려고 조금만 노력하면 많은 것들이 바뀔 텐데도,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항상 우리는 이해 받기를 원하지, 이해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이해하지 않고 있다는 자각 만으로도 참 많은 것들이 바뀔 텐데 말이다.  



 며칠 후, 친구가 레지던시에 놀러 왔다. 루시아는 이미 닭장을 벗어나 네 마리 병아리들을 이끌고 밭 여기저기로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테라스에는 닭 똥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아침에도 치웠는데 곧 다시 치워야 할 판이었다. 아무리 루시아에게 말해도 뭐,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루시아에게 똥을 싸지 말라고 말을 거는 내가 우스웠다. 


친구와 테라스에 앉아 이야기하는데, 물에 젖어 바닥에서 버둥대는 벌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벌을 유리병에 담아 날려 보내기 위해 컵을 가지러 부엌으로 들어가는데, 내가 뭐라 말할 새 없이 친구가 벌을 두 손가락으로 집었다. 나름대로 벌을 구해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곧 악! 하는 소리와 함께 친구가 벌을 떨쳐내려 손을 사방으로 털어 내었다. 이내 벌이 툭-하고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나는 부엌에서 컵을 가지고 와 벌을 담아 풀잎에 놓아주었다. 



 ‘사랑’을 도서 사이트에 쳐보면, 사랑에 관련된 책이 넘쳐난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제목의 책들이 수도 없이 많다. 몇 년 전 이태리에서 살던 삶을 정리하면서, 앞으로 내가 살아갈 방향이 뭘까 진지하게 고민했던 시기가 있다. 뭘 바라보고 살아가야 할까. 고민했고 어느 순간 답이 참으로 뚜렷해 보였다. 바로 사랑이었다. 남녀관계만의 사랑이 아니라, 매 순간 만나는 생명을, 한 존재로서 사랑하자, 했다. 


 그러면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The Art Of Loving (사랑의 예술)의 저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이루는 원소 중의 하나로 ‘앎’을 말하는데, 다른 이에 대해 안다는 것은, 오직 나 자신만의 중요성을 초월하여, 상대방을 그 사람의 관점으로 볼 때에만 가능하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나와 루시아는 우리의 첫 접촉에서 완전히 사랑에 실패한 셈이다. 


또 루시아 말고도 내 인생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내가 사랑하지 않으며, 지나쳐 보냈을까. 자신만의 중요성에 얽매여 상대방을 그 자신의 관점으로 바라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은 또한 책 전체에 걸쳐 사랑은 ‘살아있는 예술’이며,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을 마스터하고 연습하듯 행해져야 한다고도 말했다. 예술가가 작업을 완성하기까지 수없이 많은 실패를 겪고, 그것으로부터 배워나간다는 것을 생각해 보며, 나 자신도 많은 실패를 거치면서도, 조금 더, 조금 더, 사랑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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