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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융 Oct 01. 2017

한 생명, 나비.

내가 브라질의 예술가 레지던스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아침에 일어나 밖에 나가보니 테라스에 위치한 소파 위에, 까맣고 하얀 무언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뭐지, 가까이 다가가서 보았다. 그때 그 중에 까만 게 움직이더니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개였다. 

나비와 하얀 개


 두 마리가 소파에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몸을 보니 며칠은 족히 굶은 듯 뼈 마디마디가 한눈에 보일 정도로 튀어나와 있었고, 까만 개의 몸에는 여기저기 상처가 가득했다. 더군다나 한쪽 눈은 실명이 된 듯, 탁한 색이었다. 내가 소파에서 내려오라고 손짓을 했고, 개들이 귀찮은 듯 엉기적 엉기적 소파에서 내려왔는데, 나는 그때 까만 개가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는 걸 보았다.


‘이 애들을 어떻게 할까’


마음 같아서는 내가 거두고 싶었지만, 내 집도 아니고 단순히 몇 개월 머무는 처지에 이 개들을 거둘 수가 없었다. 내가 당장 밥이라도 챙겨주면, 다음 날도 계속해서 밥을 얻어먹으러 오게 될 거였다. 지금 당장은 내가 밥을 주고 챙겨 주어도, 내가 가고 난 이후에는 남겨진 이들이 이 개의 사료 값을 내고, 챙겨줘야 하기 때문에 나는 간단히 내 맘대로 결정할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레지던시의 주인인 빅터가 개들을 발견하고는 개들을 테라스 밖으로 쫓아내었다. 개들은 꼬리를 말고 앙상한 몸으로 어딘가로 향했는데, 레지던시 부지 안에 있는 연습실의 건물 밑의 조그만 틈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빅터는 개들을 내쫓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진 며칠 동안 집 안에 몇 차례의 습격이 있었다. 하얀 개는 어디론지 떠나버렸고, 남겨진 까만 개가 배가 너무나 고픈 나머지 내가 없는 사이 집 안에 몰래 들어와서, 쓰레기 통을 마구 뒤져댄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쫓아내도 딱 그 순간일 뿐, 우리가 보지 않을 때는 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와 마구 난장판을 만들었다. 쓰레기 통은 찌그러져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고, 쓰레기들은 집 안이며 테라스며 여기저기 흩어져, 대체 어디서부터 치워야 할지 참 난감했다. 거기다가 우리가 안 볼 때는 테라스의 소파에 와서 자꾸 눕곤 했는데, 어느 날부터 소파에 앉고 나서는 온 몸이 가렵기 시작했다. 개가 소파에다가 벼룩을 옮긴 탓이었다. 


 그런 상황이 지속되고 한 달. 나는 앙상한 개가 너무나 안쓰러웠다. 게다가 개의 절뚝대는 한쪽 다리와 실명된 한쪽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개의 살아온 삶이 얼마나 고통이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정말로 곧 죽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 부분은 빅터도 인정하는 바였다. 더 이상 가만 둘 수 없었던 나는, 몇 개월 치 사료 값을 빅터에게 지불하고, 내가 목욕이며 벼룩 약도 뿌려주겠다며 약속을 하고는, 그 개를 거두게 되었다. 


바로 그 날, 그 개의 목욕을 시키고, 소파며 강아지에 몸에 벼룩 약을 뿌리고, 드디어 밥을 먹였다. 집까지 뚝딱 지어주고 나니, 마지막으로 남은 일은 이름을 붙이는 거였다. 나는 쉽게 이름을 지었다. ‘나비’. 나비가 풀 숲으로 뛰어다닐 때면, 나비의 귀가 팔랑팔랑 거리며 마치 하늘을 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 신기한 건, 그 다음 날부터 나비는 나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것을 주기 시작했다. 바로 사랑이었다. 마치 내가 나비를 도와주었다는 것을 아는 것만 같았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면, 나비는 꼬리를 흔들며 문 앞에 다가와 앉아 있었다. 꼬리를 흔드는 소리가 문 밖에서 소란스럽게 들려왔다. 내가 문을 열면 나비가 가장 먼저 반겨주었고, 내가 어디를 가던 따라왔다. 내가 100미터 전방에서 나비! 하고 소리를 지를 때면, 나비는 절뚝거리는 다리로 최선을 다해 뛰어왔다. 나비의 귀가 팔랑대고 있었다. 나비와 나는 소통했으며 우리는 정말로 서로 아껴주었다. 거기다가 나에 대한 나비의 사랑은 아주 한결같아서, 처음 보는 사람들도 나비와 나를 보면 ‘강아지가 진짜 좋아하네요’ 하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의 개 두키가 놀러 왔다. 나비와 두키는 탐색전을 좀 벌이는가 싶더니, 곧 두키가 나비의 집에 한 가득 소변을 보았고, 그 것이 싸움의 발단이 되었다. 내가 말릴 새도 없이 싸움이 붙었다. 내가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져 막아 보려고 해도 나비는 물고 있던 두키의 목에서 피를 볼 때까지 두키를 놓아주지 않았다. 한쪽 눈이 실명 인 데다가 한쪽 다리마저 절뚝거리는데도, 나비는 그런 것 따윈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두키와의 싸움에서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두키가 나중에는 낑낑대고 있었다.


 간신히 나비를 두키로부터 떼 내었는데, 그 후로부터는 두키랑 마주치기만 해도 서로 으르렁 거리며 죽일 듯이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가끔 나비와 산책이라도 하다가 두키를 마주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난리가 났다. 그럴 때면 내 심장이 벌렁벌렁 뛰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두키와 나비가 싸운 날은 하루 종일 손이 덜덜 떨렸다. 게다가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나비의 집안 쓰레기통을 뒤지는 버릇도 아직 남아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종종 나비 때문에 나는 속을 썩곤 했다.



누군가는 나에게 말했다. 

“저 놈 저거 고쳐지지 않으니까, 그냥 차에 실어서 멀리 갖다가 버려야 돼”


 수피이즘을 공부하며 자신이 구도의 길을 걷고 있다고 소개하는 사람이었다. 책에서 나온 내용을 로봇처럼 읊으며, 매일 사랑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사람이, 맘대로 되지 않으니 그냥 개를 차에 실어서 멀리 데려다가 버리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화가 났다. 


 우리가 구도의 길을 걷는 이유는 대체 뭔가. 나는 더 ‘잘 살기 위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이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정치도, 예술도, 종교도, 의술도…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잘 살기 위해’ 존재한다. 구도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잘 산다는 것은 뭘까. 적어도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생명을 무시하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잘 산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비가 하는 행동들- 우리가 문제 행동이라고 부르는 그 모든 것들- 은 문제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근원적인 아픔으로부터 발현되어 나오는 증상인 것이다. 쓰레기통을 계속 뒤지는 것은 아사 직전까지 갔던 죽음의 공포에서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다른 개에게 보이는 공격성은 길에서 살아남고자 했던 생존의식에서 나온 것일 터였다. 그런데 그 증상만 보고서 그 생명 자체를 문제라 치부해 버리고, 등을 돌리고자 마음먹는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더군다나 구도의 길을 걷는 사람이 눈을 닫고 마음을 닫은 채 당장 눈 앞의 꺼져가는 생명을 무시한다면, 대체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진짜 깨달음은 책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깨달음은 나 자신이 하는 행동과 말로부터 나온다. 


 틱낫한 스님의 책 ‘마음에는 평화를, 얼굴에는 미소를’이라는 책에는 그런 내용이 나온다. 


우리는 고아원에 있는 상처 많은 아이들을 돌보러 그곳에 봉사 활동을 하러 간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가서 보는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사랑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상처받은 아이들을 보듬어 주고 사랑해줄 수 없다면 세상에 누구를 우리가 사랑해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그 상처받은 아이들과 같다. 그 아이들과 우리가 다른 게 대체 뭐란 말인가. 우리는 모두 각자의 상처를 가지며, 그 상처를 비뚤게 표현하는 ‘증상’들을 가지고 있다. 정말 물어보자. 우리가, 그들과 다른가? 나에게 나비를 갖다 버리라고 한 그 이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그 상처받은 아이들을 치유해 줄 수 있는 건 뭘까? 나는 사랑만이 진정한 해답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도 단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사랑 말이다. 


 나비는 그 이후로 몇 개월간을 나와 함께 지냈다. 그 몇 개월간 나비의 쓰레기통을 뒤지는 횟수는 점점 줄어서 더 이상 쓰레기통을 뒤지지 않게 되었다. 밥을 꼬박꼬박 챙겨주니, 더 이상 음식을 ‘쟁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두키와의 관계는, 완벽히 좋아지진 않았지만, 서로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 상태에서는 괜찮은 정도까지 호전됐다. 내가 떠날 때, 나비는 마치 내가 떠나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지 구슬피 울었다. 



 내가 떠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빅터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비에 대한 소식이었다. 내가 떠나고 2주가 지났을 때, 나비가 마치 처음 그 날 집에 도착했던 것처럼, 홀연히 사라졌다고 했다. 그들은 나비에게 똑같이 사료를 줬기에 왜 떠났는지 영문을 모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난 왠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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