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계란을 살 때 동물 복지마크가 찍혀 있는지를 꼭 확인해 보고 산다. 몇 년간을 채식주의자로 살아본 적도 있다. 채식주의자가 됬던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에 어떤 생명을, 단지 내 생명을 조금 더 유지하고자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싫어서라는 이유도 있었다. 이런 고상한 말을 늘어 놓았지만, 어쨌든 지금, 나는 고기를 먹는다. 삼겹살을 먹으러 가서 그 돼지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왔고 어떤 음식을 먹고 자랐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와구와구 잘만 먹는다. '맛있다, 맛있다'를 연발하면서 잘도 먹는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나는 '동물 복지 계란'을 골라 산다. 모순이다.
가끔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완전히 모순에 둘러쌓인 존재라는 것을 느낀다. 사람들은 어느 한 곳에서는 민족주의를 외치지만 또한 자신이 그 민족주의의 차별 대상이 되는 순간 민족주의를 비난한다. 마크 트웨인은 [전쟁을 위한 기도]에서 사람들이 전쟁을 '내 이웃과 내 가족을 지키는 행위'라는 따뜻하고 열정어린 말로 포장하지만 결국엔 그건 다른 누군가의 생명을 무자비하게 뺏는 일과 다름 없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누군가는 자신의 아이에게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가르치면서도 제주의 난민들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폭력적인 말과 행동을 보이고, 누군가는 평등을 주장하지만 특정 소수인들에 대해서는 그 평등이라는 가치가 없어지는 것처럼 행동한다. 누군가는 불륜이라는 것에 엄청난 반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그런 유혹이 오면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기도 한다. 우리는 지금 살아있는 인간들 마저도 존중하지 않으면서, '새 생명' 이라는 말을 들으면 엄청나게 숭고하고 아름다우며 무조건 보호 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돈을 주고 뭔가를 배워야 할 때는 그 비용을 엄청나게 아까워 하면서도, 똑같은 비용을 들여 아무렇지 않게 치킨을 사먹고 술을 마신다. 자살을 하고 싶었으나 또한 지옥에도 가기 싫었던 17세기의 기독교 인들은 갓 태어난 어린 아이를 살해하고 사형을 언도받음으로써 간접적 자살을 했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위해 싸운다던 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성범죄가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그렇다면 이런 모순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 근원을 하나의 요인으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 하겠지만, 그 중에는 '우리가 자신의 불완전하고 역겨운 모습들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 이라는 이유가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되고자 하는 것과, 우리의 실제 모습 (나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추한 면)이 부딪혀 그런 모순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는 아름답고 싶어한다. 사랑받는 존재가 되고 싶어한다. 정의로운 존재가 되고 싶어하고, 명예롭고, 부지런하고, 성실해 보이는 존재가 되고 싶어한다. 그리고 쓸모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한다. 그렇게 자신의 내면에서 (구체적이진 않더라도) '아름다운 인간'에 대한 어떤 기준을 만들어 놓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자신을 끼워 맞추려 무던히도 애를 쓴다. 부패한 정치인에 대해 욕을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일상에서 사소한 부패들을 저지르고 있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건 오로지 '나'의 삶을 바탕으로 한 '옳음'이다. 어디에도 절대적인 옳음은 없다. 우리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지' 라고 자신감에 차서 말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상황이 변하면, 특히 자신이 불리한 상황에 처하면, 우리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자신하는 것과 달리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좀처럼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점을 인정하기 싫어한다.
진실을 바라보는 일은 생각처럼 행복한 일이 아니다. 많은 경우 그것은 고통스럽고 또한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글을 적다보니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이런 모임을 만드는 건 어떨까? 일주일에 한번 모르는 사람들과 특정한 장소에서 만나 나의 추한 면에 대해, 내가 누구에게 이야기 하지 않았던 그런 혐오스러운 모습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어떤 일체의 친목 없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듣고, 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임이 성사될 가능성은 아주 낮다. 아마 누군가는 지금 이순간 '나는 그런 모임에 꼭 가야지'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모임 날이 다가오면 안가기로 마음을 바꿀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만약 내가 '나의 모순을 극복할 거야' 라며 완전히 '생명'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해도, 나의 모순은 극복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다시 질문할 것이다. "그런데 그 '생명'의 기준은 뭐지?" 라며... 관념이 이토록 힘이 없고 애매한 것임을 실감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내가 정말 아무것도 먹지 않기로 마음 먹는다 해도, 현실의 경쟁에서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가려 한다면 그건 또한 다른 생명을 나의 삶을 위해 희생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는, 그저 이대로, 내 안의 모순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며 살아야 하는 걸까?
나도 잘 모르겠다. 정말 우리가 우리 안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지. 아마 인간의 모순을 완전히 극복한 그런 사람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지금도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는 우리 안의 모순을 알아챌 수 있다. 그리고, '정의하기'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정의내린 '옳음'에 대해 의심해 볼 수 있다. 변명하려는 생각 없이 말이다. 그리고 그 옳음에 대해 '왜?'라고 물을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옳음'은 스스로 생각한 것이 아닌 누군가로부터, 선생과 부모, 지도자들과 전통, 관습으로부터 주입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만약 누군가와 스마트폰에 대해서 언쟁을 벌인다고 치자. 그 사람은 스마트 폰을 아주 많이 보는 사람이고, 당신은 스마트 폰이 우리의 정신을 흐리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 때 당신은 스마트 폰을 들여다 보는 행위를 '옳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이런 생각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당신이 언젠가 본 책에서 나온 내용이 아닌가? 당신이 존경하는 누군가가 했던 얘기가 아닌가? 뉴스에서 스마트폰을 보는 것이 안좋다는 이야기를 본 것이 아닌가? 나는 묻고 싶다. 그 의견이, 당신이 정말 '느끼고 생각해서' 도출해 놓은 결과인가? 우리가 가진 대부분의 의견은 이런 식으로 외부에 의해 만들어지고 우리에 의해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진다. 마치 기계처럼 말이다. 그런데 나는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만약 우리가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질문해 나가고, 그 질문이 답해진 뒤에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 때 우리는 모순 없이 새로 시작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물론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최초의 인간'은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