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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융 Jul 21. 2018

부모가 된다는 것

힐빌리의 노래

힐빌리의 노래를 다시 읽고 있다. 맨 처음 읽었을 때, 버스나 지하철에서 책을 읽으며 계속 눈물을 쏟아냈던 기억이 있다. 그만큼 이 책에 쓰인 많은 일화들은 나의 감정을 자극했다. 이번에 다시 힐빌리의 노래를 읽으면서도 나는 눈물을 쏟았다. 버스에 앉아 몰래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떤 기억들이 떠올랐다. 나 자신의 어린 시절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내가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 학원을 다닐 때 만난, 당시 내 또래의 아이들이 떠올랐다. 그때는 (나를 포함한) 그 아이들이 모두 그저 꼴통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난다. 그 아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대부분 불안정한 가정에서 자라왔다는 것. 어떤 아이는 어릴 적에 아버지가 자기를 버렸다고 했고, 어떤 아이는 집에서 매일매일 일어나고 있는 아버지의 폭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머니의 술버릇에 대해 이야기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마치 웃긴 일이라는 듯 소리 내어 웃어대며 이런 얘기들을 했다. 웃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하지 않으면 자신이 감정적으로 힘들어지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나는 그 기분을 이해한다. 뿐만 아니라, 이혼가정, 편부모 가정, 그것도 아니면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가정이 흔했다. 당시 나랑 친하게 지내던 어떤 아이의 부모는 아이가 며칠씩이나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나는 학교를 그만둔 아이들 중에 안정적인 가정환경을 가진 아이들이 없었다는 사실이 단지 우연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나를 포함한 그 아이들은 어설프게도 나쁜 짓을 골라하려고 애를 썼고, 또 매 순간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건 바로, 세상에 누군가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 스스로 강해지려고,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노력했던 것일 테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도 그런 현실을 본다. 나는 가끔 초등학교에서 아르바이트로 예술 수업을 하는데, 무언가 주입시키는 수업을 하기보다, 아이들이 이미 가진 것들을 창의적으로 풀어나가는 수업을 즐겨한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신나게 뛰어 놀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물론 예술활동 수업이라는 특수한 수업이 이런 시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일 테다. 그런데 그런 수업을 하다 보면, 개인의 특성이 또렷이 드러난다. 그중 어떤 아이들은 '관심'과 '애정'에 목이 마르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 아이들은 특히 나에게 엄청난 애착을 보여주는데, 나는 그 아이들이 불안정한 가정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을 그 아이들이 은연중에 하는 말로 알아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지 않는 아이에게 왜 가지 않느냐고 물어봤을 때, "아빠가 집에 있어서 가기 싫다"거나, "어차피 아무도 관심 없다"라고 하는 아이들이 있다. 언젠가는 팔에 자해를 한 흔적이 가득한 아이를 본 적도 있다. 그 아이들은 열한 살, 열두 살 남짓이다. 


그럴 때면 회의감이 든다. 내가 만약 이렇게 아이들을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도록 한다고 해도,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그 아이들을 기르는 사람이 그렇지 못하다면, 아이들의 부모가 끊임없이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면, 내가 하는 이 일이 무슨 소용일까?


희망차게 '소용 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실제로는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다. 특히나 한 과목만을 담당하는 선생님이라면, 아이의 모든 것을 신경 쓰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나에게는 한 분의 선생님이 계시다. 그리고 나는 그분이 어린 시절의 내 인생을 구원해 주셨다고 느낀다. 다른 무엇도 아닌 그분의 '관심과 사랑'으로 말이다. 물론 선생님은 나의 중학교 담임선생님이셨고,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나는 방황했다. 그러나 방황하는 그 순간에도,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세상에 단 한 명쯤은 있다'라는 생각이 나를 지탱해주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나는 선생님에게서 구원받은 것뿐만 아니라 또한 중요한 한 가지를 배웠다. 사랑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랑을 주는 방식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대부분의 부모는 분명 자기 자식을 사랑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방식은 비뚤어져 있다. 그렇기에 이리도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병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리라. 


이런저런 경험이 쌓이면서 교육자의 책임이란, 특히 부모의 책임이란 엄청난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에 나는 아이를 가지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는다. 나는 좋은 부모가 될 자신이 없다. 나의 모자람으로 한 생명이, 그것도 내가 사랑하는 나의 아이가 고통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내 언니는 약 7개월 전 첫 아이를 출산했다. 사실 나는 언니가 아이를 가졌을 때부터 걱정이 많았다. 언니는 어렸을 적부터 잠이 많았고, (미안하지만) 게을렀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는 일 교시 중간이나 일교시를 끝나고 집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흔했고, 가까운 거리의 학교를 거의 매일, 어머니가 차로 데려다주셨다. 그런 태도는 언니가 사회인이 되고 나서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고, 나는 그런 언니가 걱정됐다.


그런데 언니는 아이를 낳고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아이에게 부족함 없이 사랑을 주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조금이라도 들릴라치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이 단지 스스로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언니의 변화가 신기했고, 대견했다. 그리고 내 조카는 분명 나와 언니보다는 훨씬 안정적인 상황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랄 거라 생각하니 기뻤다. 안도했다. 감동했다. 


사실 많은 부모들이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도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스트레스나 화나는 감정을 알게 모르게 자식에게 쏟아낸다. 그리고 부모들은 동의하지 않으려 하겠지만, 아이들은 '감정 쓰레기통'으로 전락하고 만다. 여기서 나는 부모가 완벽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라서 가끔은 화를 조절하기 힘들고, 쏟아지는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힘들다. 가끔은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을 쏟아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런 행동들이 '습관화' 되는 지점이 있다. 그리고 그런 행동들이 '습관화'되는 지점은, 아이들의 인생을 일촉즉발의 지뢰밭으로 만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자. 만약 나와 같이 사는 나의 부모가 어느 날은 다정하다가도, 또 어느 날은 영문 모를 이유로 잔뜩 화가 나 손 발을 휘두르고 소리를 질러댄다면, 아이는 부모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될 것이며, 나아가 세상,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된다. 부모의 일관성 없는 태도는 아이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세상을 향해 회의적으로 만든다. 나는 우리가 '반항아'라고 일컫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이 지점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의 세계는 가족이다. 우리는 아이가 세계로 나아가기 전에 보는 작은 세계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세계를 일부러 지옥으로 만들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그러지 않기 위해 우리는 부모가 되지 전에 먼저, 자신의 책임을 인지해야 한다. 자신의 약점을, 자신의 비합리성을 들여다보고, 존재를 변화시킬 준비를 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앞서 말한 나의 선생님처럼 상처 입은 누군가에게 구원의 존재가 되어 줄 수 있다. 그저 조그만 '관심과 사랑'으로 말이다. 주변을 둘러보자. 상처받은 영혼이 거기, 어디에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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