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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융 Oct 06. 2017

넌 어떻게 좋은 사람들만 만나냐

내 존재의 영향

 내 친구들은 가끔씩 나에게 그런 말들을 하곤 했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좋은 사람들만 만나냐고.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바에 가도 칵테일을 두세 잔씩 공짜로 얻어먹곤 했고, 택시를 타도 기사 아저씨가 택시비를 공짜로 해주곤 했으며, 하다못해 식당에 가도 꼭 무언가를 서비스로 받곤 했기 때문이다. 꼭 이런 물리적인 도움이 아니더라도, 좋은 미소, 좋은 말을 전해주는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어떤 부족에 대한 얘기가 있다. 그 부족은 범죄 재범률이 극히 낮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부족이 범죄를 저지른 이를 재판하는 방식은 아주 독특하다. 먼저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며칠간 부족의 사람들이 다니는 길가에 서 있게 한다. 그리고 며칠 동안 부족민들은 그 길을 지나다니면서 그 사람이 자신에게 잘 해주었던, 좋은 영향을 주었던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한다. 가령, 


“지난주에 먹을 것을 나누어 주어 고마웠어요.”


“저번에 나에게 웃어주어서 너무 고마워요” 


“당신은 너무나 성실하게 일합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한 마디씩 던지며 지나간다. 범죄를 저지른 그 사람은 자신이 했던 선행에 대해서, 자신의 아름다운 면에 대해서 끊임없이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재판은 그 사람이 새 사람이 된 것을 축하하는의미로 축제를 가지며 끝나게 된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왜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일까. 아니, 그전에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기준은 뭔가. 토마스 홉스는 선과 악을 탈가치적 개념으로 보며, “어떤 사람이 욕구하는 대상은 바로 그 사람에게는 선이며 그가 혐오하는 대상은 그것이 어떤 것이건 간에 악이다.”라는 입장을 취했다. 말하자면 칼이 자신을 향해 찔러 올 때, 칼이 자신을 해치므로 칼은 그 순간 악이 되고, 음식을 썰거나 자신이 필요한 곳에 칼을 쓸 때, 그 칼은 그 순간 선이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의 내면을 보는 데에도 두 가지 관점이 존재한다. 선으로 볼 것인가, 악으로 볼 것인가는 우리 자신의 결정에 따라 나뉜다. 하지만 그 두 가지 관점에 속하지 않고, 우리는 그 중간으로 빠져나올 수도 있다. 바로 어떤 판단을 보류하는 일이다. 그 판단을 보류할 때, 우리의 선과 악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사실, 그 둘은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생각해 보면, 택시를 탈 때, 나는 그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고, 안부를 묻고, 가끔은 조수석에 올라타서, 나 혼자 기분이 좋아서 큰 소리로 혼자 노래를 부를 때도 있었다. 태국에서 한 번은, 한 시간 거리의 구간을 택시를 타고 가게 됐는데, 그 날 바람이 너무 좋고 또 나는 신이 나서, 한 시간을 혼자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있다. 도착했을 때, 내가 감사하다고 말하니, 아저씨는 내가 더 감사하다고 말하며 웃어 보였다.


 누군가 나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은, 내가 하는 행동과 말로 하여금 그 사람에게 자신의 좋은 모습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너는 좋아져야 해’ ‘너는 예의 바르게 굴어야 해.’ ‘너는 어떻게 되어야 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신의 존재로써 상대방에게 자신의 좀 더 높은 차원의 본성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좋은 가르침이란 것도 똑같다. 좋은 가르침이란, 내 경험에 미루어 보아, 오직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진정한 교육자는, ‘이걸 해, 저걸 해.’‘00가 돼야 해’라고 하는 사람이 아닌, 그 사람의 행동과 말로써 상대가 가야 할 길을 암시해 주는 사람이다. 상대에게 자기 자신이 직접 배울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두는 것이다. 


 아주 정반대의 예인데, 언제 한 번은 브라질에 입국하면서 비자 문제가 불거졌던 적이 있었다. 내 부주의로써 생겼던 일인데, 비자 만료가 되기 전에 비자를 연장하기 위해 출입국 사무소에 갔더니, 이미비자가 만료됐다며 일주일 뒤에 바로 출국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어떻게 된 일인고 하니, 원래는 90일이었던 체류 기간을, 입국할 당시 공항 직원이 대신 60일을 찍어서 줬는데, 내가 확인을 하지 않고 있던 탓이다. 그때 나는 말도 안 된다며 아무 잘못이 없는 출입국 사무소 직원에게 실컷 불평을 했고,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로 1층에 내려가서 벌금을 납부하려고 서류에 내 이름이며 인적 사항을 적어 냈는데, 나를 상대하던 직원이 알아볼 수가 없다며 다시 적으라고 서류를 내 쪽으로 휙 던져버렸다. 내가 마찬가지로 또박또박 다시 적어 내자, 직원이 여전히 알아볼 수가 없다며, 나를 비웃고는 담배를 물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때, 나는 그 직원의 태도에 너무 화가 나서 부끄럽게도 한동안 그 직원을 생각하며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매도 했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을 돌이켜 보니, 내가 그곳에 가지고 갔던 에너지가 그 사람이 가진 낮은 차원의 본성을 발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난 수행이 한참 부족한 탓에, 나중이 돼서야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 하나하나가 쌓여서 우리에게 질병과 건강을 가져오는 것과 같이, 우리가 보는 영화가 우리 하루의 무드를 바꾸는 것과 같이, 우리가 듣는 소음과 정적이 우리 안의 평화를 가꾸는 것과 같이, 우리가보고, 듣고, 말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준다. 하물며 그 직원에게 내가 가져다준 에너지는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는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가능하다.

 

 나는 우리 사이에 마치 보이지 않는 실들이 우리를 연결해 주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에너지, 기라고 부르고, 성령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지만, 결국은 모두가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들은 우리를 연결해주며, 주고받고 있다. 내가 오늘 만난 어떤 이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에너지를 주었을 때, 그 사람은 그 영향을 안고서는 다음 상대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도 과장된 말은 아니다.


내 존재가 끼칠 수 있는 영향이란 참으로 엄청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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