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함께 걷기

카라멜 남자, 화이트 초콜릿 여자 007

by 권민재
과학은 반역이다
프리먼 다이슨 (1923~2020)



어떤 문화든 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강요한다는 점에서 독재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으며, 과학은 그런 독재에 대한 자유로운 영혼들의 저항이다. - 프리먼 다이슨, 1979



세계적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이 후학들과 20년에 걸쳐 나눈 대화를 집필한 책 <어느 노 과학자의 마지막 강의(프리먼 다이슨 외, 2015)>에 수록된 수많은 명구는 청년으로서, 연구자로서, 그리고 할아버지의 손주로서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청년으로서 나는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자 한다.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어 다음 세대에게 살기 좋은 환경을 물려주고자 하는 열정이 있다. 그 열정은 중년층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뜨겁다. 기후변화로 인간이 살기 어려운 환경이 되어가는 지구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관심을 가진다든가, 정부와 기업의 부정부패에 분노한다든가, 부양할 가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연구자로서 나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기술을 발전시킨다. 내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찾는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다른 분야의 전문가와 끊임없이 학술적 토론을 하며 인류의 지식을 확장한다. 현실의 복잡한 다물리 현상을 합리적인 계산 비용과 높은 신뢰도의 예측 모델을 사용해 분석한다든가, 새로이 태동하는 공학적, 과학적 분야에 뛰어들어 세계적 석학과 연구의 최전선에서 선의의 경쟁과 협력을 한다.



예비창업가로서 나는 세상을 바꿀 기술을 현실과 접목시키기 위해 사람과 사람을 잇는다. 더 넓은 세상, 더 큰 시장에 진출해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니즈에 주목한다. 핵심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CTO를 영입한다거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전 세계 방방곡곡을 발품 판다거나, 온 열정을 다 바칠 수 있을 만큼 미친 듯이 내 사업아이템에 몰입한다.



손주로서 나는 할아버지에게서 생각하는 힘과 버티는 끈기를 배운다. 나만 포기하지 않으면 실패란 없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할아버지와 손잡고 세상에 대해 배우던 때를 떠올린다. 언제나 직업을 바꿀 준비를 하고, 수려한 말솜씨와 컴퓨터 다루는 능력을 꾸준히 갈고닦는다.






프리먼 다이슨을 읽으며 언제나 놀라는 것은 과학자로서 배울 점이다. 깔끔한 문장력과 컴퓨터 프로그래밍 기술은 언제나 유용하다는 그의 지혜부터 시작해서, 과학계 커뮤니티가 가진 특징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고 후대에게 조언을 하는 통찰력까지. 무엇 하나 보고 배우지 않을 점이 없다.



그런 그의 책에서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대목은 그의 시점에서 다른 과학자를 바라본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프리먼 다이슨은 리처드 파인만과 한스 베테 모두와 친했다. 리처드 파인만은 동료 과학자였으며, 한스 베테는 다이슨의 멘토이자 박사과정 지도교수였다.



파인만과 함께 엘버커키로의 드라이브를 떠나 나눈 이야기는 낭만 있기 그지없었다. "길 위에서(잭 케루악)"를 연상시키는 그 장면은 핸드폰이 없던 당시 시대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었다. 정보의 홍수가 아닌 그들이 아는 것과 옳다고 믿는 것을 바탕으로 밤새도록 토론을 나눌 수 있는 그 환경이 부러웠다.



이 장면을 오늘날의 나에게 대입시켜 보았다. 나는 누군가와 드라이브하며 서로가 아는 것과 옳다고 믿는 것을 가지고 그렇게 재미있는 토론을 나눌 수 있을까? 아마도 제풀에 지쳐 오락을 갈망할지도 모른다. 스마트폰이 사람을 중독시키고 집중력을 떨어뜨린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건강한 방법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도서관에 있기보다 언제든지 내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와 같이 있는 것이 좋다. 요즘 내게 연구실이 그렇다. 연구실에 가면 lab mate가 있어 그와 어떤 이야기든 토론할 수 있다. 새로 배운 지식, 정보라든지, 고민을 나눌 수 있다. 남에게 말하면서 체득하는 것이다.

내게 필요한 건 바로 그것이다. 내가 오늘 배운 것을 입으로 내뱉는 것.



프리먼 다이슨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 넓은 세계를 조망한 이가 한 명 더 있다. 오늘날 <어느 노과학자의 마지막 강의>를 있게 한 교양 강의의 교수이자 책의 엮은이, 드와이트 노이엔슈반더이다. 그는 역사책에만 쓰인 제2차 세계대전을 프리먼 다이슨의 깊은 통찰력과 함께 20대의 학생들에게 전달했다.



한 사람의 간접적인 수강생으로서 나는 제2차 세계대전의 숨은 면모를 깨달았다. 핵분열 현상의 발견과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시기적으로 1년이 채 차이가 나지 않는다. "러시아인들이 핵무기를 만들 수 있냐"라는 트루먼 대통령의 질문에 과학자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렇다면 미국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도 (핵무기를) 만듭니다."라고 대답했다. 핵무기 개발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과학자들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을 때 동일한 나잇대의 젊은 청년들은 전쟁터에서 포탄과 탄환에 고통받으며 죽어나가고 있었다. 지식이 그들의 고통을 멈출 수 있다면 그것은 핵무기를 개발하기에 충분한 명분이 되어줄 것이었다.



내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연구자라면 핵무기 개발을 거부할 수 있었을까? 가족을 위한 선택이라는 건 때론, 어쩌면 항상, 인류 전체의 보전보다 우선시될지도 모르겠다.



카라멜 남자, 화이트 초콜릿 여자 007 - 마침

이야기는 사실을 기반으로 각색되었습니다.

<어느 노 과학자의 마지막 강의(프리먼 다이슨 외, 2015)>를 참고하였습니다.

원저작물의 저작권은 브런치 스토리 작가 권민재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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