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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Jan 06. 2021

[Breathing]

싱어송라이터 전진희의 가장 사적인 결과물

전진희 [Breathing]



[Breathing]은 싱어송라이터 전진희의 가장 사적인 결과물이다. 가사 한 줄 없는 연주 앨범임에도 그렇다. 앨범엔 그가 살아낸 어떤 날들이 담겨있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지난 2년 반 동안 그는 종종 창밖 풍경이 보이는 방 안 피아노 앞에 앉아 즉흥적으로 순간을 기록해 왔다. 그렇게 연주하며 녹음한 곡들은 그의 사운드클라우드에 ‘Breathing’이란 이름의 시리즈로 하나씩 공개됐다.


이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계기로 이루어졌다. 밝고 쾌활했던 그에게 느닷없이 불안 장애가 찾아온 것이다. 음악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던 2018년 어느 봄날이었다. 하던 일을 모조리 중단해야 했을 만큼 증세가 심각했던 그는 머리를 쓰지 않고 마음이 가는 대로 편하게 소리를 담아보고 싶어졌다. 그때 무작정 건반에 손을 올리고 처음으로 풀어낸 곡이 ‘Breathing in April’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Breathing’의 시작이었다.


날 것 그대로의 음악에 많은 이가 반응했다. 아티스트로선 뜻밖의 일이었다. 그에겐 그저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담아낸 소리였기에 별다른 호응을 기대하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의 공감과 성원은 또 다른 ‘Breathing’으로 이어졌고, 이후 지금까지 총 28개의 소리가 쌓였다. 전진희는 자신을 고통과 불안의 심연에서 꺼내준 이 프로젝트 중 13곡을 모아 한 장의 앨범으로 재탄생 시켰다.



마냥 낭만적인 연주곡집을 생각했다면 곤란하다. [Breathing]은 예쁜 선율로 배경음을 자처하는 식의 연주 앨범과는 결이 다르다. 차라리 한 개인의 생존 기록에 가깝다. 실제로 그는 “살기 위해 시작했다”는 말로 프로젝트를 설명한 바 있다. 음악에는 그가 피아노 앞에 앉은 날의 온도, 계절의 냄새, 당시의 감정과 기분이 그대로 스며들었다. “대부분 힘들었던 기분이 담겼다”는 전진희의 말이 작품의 성격을 대변한다.


앨범 속 열두 달은 차분히 흐른다. 애써 힘들이지 않고 은은하게 퍼지는 곡조가 파동을 일으킨다. 대개 쓸쓸하고 서늘하지만, 한편으론 정답고 인간적이다. 거창한 의도나 화려한 꾸밈 대신 순간의 미학을 진솔하고 소박하게 담아서다. 섬세하게 감정선을 그리면서도 대놓고 호소하진 않는다는 점에서 아티스트의 이전 솔로 앨범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3분 내외의 짧은 즉흥곡들에서도 창작자의 역량은 분명히 드러난다. 반복되는 한 음정을 풍부한 왼손 반주로 감싸는 ‘February’를 보자. 세밀한 세기 조절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사운드스케이프는 듣는 이의 마음을 어렵지 않게 움직인다. 비교적 간단한 코드 워크를 고감도로 전개한 ‘March’, 스산한 비애감이 느껴지는 ‘April’도 수준급이다. ‘May’와 ‘June’은 탁월한 선율감을 갖췄다. 특히 사운드클라우드에 처음 올렸던 음원을 그대로 살린 ‘June’에는 누군가의 기침 소리 같은 현장음까지 고스란히 담겨 조금 더 긴 여운을 남긴다.



앨범의 하이라이트는 가을이다. ‘September’에서 ‘November’로 이어지는 4곡은 수록곡을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멜로디를 지녔다. 첫 음부터 귀를 사로잡는 ‘September’엔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파란 가을 하늘처럼 왠지 모를 허무감이 배어있다. 전진희는 이 곡을 두고 ‘폐장 후 시끌벅적하던 놀이공원에 적막만 감도는 듯한 그림이 떠오르는 곡’이라며 각별한 애정을 표하기도 했다. 애틋한 이별 영화의 주제곡으로 쓰여도 위화감이 없을 법한 ‘October’는 어떤가. 그의 사운드클라우드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즐겨 들은 곡이 ‘October’란 사실만으로도 곡의 흡수력은 충분히 증명된다.


수록곡 중 유일하게 10월이 2곡 포함된 건 아티스트의 의지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곡이라 꼭 싣고 싶었다는, 단순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이유로 수록된 ‘October ⅱ’는 누구나 좋아할 만큼 빼어난 멜로디 라인을 가졌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November’는 고전 캐럴 ‘Jingle Bells’의 모티브를 변주한 후반부가 인상적이다. 정적에서 흘러나오는 징글 벨은 이내 새롭게 변형되어 특별한 감흥을 선사한다.


연주자로서의 퍼포먼스도 특기할 필요가 있다. 밴드 하비누아주, 솔로 작업뿐 아니라 여러 뮤지션과의 협업을 수도 없이 거친 베테랑에게도 피아노 한 대만으로 채워진 앨범을 제작하는 일은 도전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즉흥으로 만들어 이미 발표한 오리지널을 정식으로 다시 녹음하는 건 모험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원곡의 뉘앙스를 그대로 가져오고 싶었던 3곡을 제외하곤 전곡을 새로 녹음해 수록했다. 능숙한 강약 조절, 섬세한 터치가 그의 열두 달을 풍요롭게 담았다.



듣고 있으면 만든 이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앨범이다. ‘January’를 만든 날은 얼마나 춥고 고독한 날이었는지, 일 년 중 가장 덥고 낮이 긴 7월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홀로 남은 겨울밤 같은 ‘July’가 탄생했는지 묻고 싶어진다. 애초에 듣는 사람을 생각하며 만든 음악이 아니기에 어딘가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는 곧 듣는 사람이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들을 수 있는 음악이란 뜻이기도 하다. [Breathing]이 전진희가 내는 첫 번째 연주 앨범,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는 이유다.



Breathing in September, Breathing in Octo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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