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싱어송라이터의 첫 정규 앨범 [갈대]는 20대의 앨범이다.
최근 인디 음악에서 자주 보이는 이름이 있다. 2018년 동료 최정윤과 듀오 ‘정윤 그리고 현서’를 결성하며 데뷔한 박현서다. 그는 SHUYA, 다린, 수림을 비롯한 여러 뮤지션의 앨범과 공연에 피아노 연주자로 참여하며 저변을 넓혀왔다. 또한 싱어송라이터 강아솔, 전진희, Oo(신온유)가 속한 음악 동아리 ‘작은평화’의 멤버이기도 하다. 그렇게 다방면으로 활약하며 그가 준비한 첫 솔로 작품은 놀랍게도 정규 앨범이다. 싱글, EP의 시대에 돋보이는 행보다.
스물다섯 싱어송라이터의 첫 정규 앨범 [갈대]는 20대의 앨범이다. 20대는 생각만큼 달콤하지 않다. 스무 살이 되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손에 꼽을 만큼 적다. 혈기 왕성한 20대는 뜻밖에도 쉽게 흔들린다. 사회에 홀로 내던져져 외로워하고, 수시로 들이닥치는 미래에 대한 불안에 괴로워한다. 여느 청춘처럼 수없이 고민하고 아파한 박현서의 지난 흔적이 [갈대]에 담겼다.
앨범에 실린 9곡은 아티스트의 내면을 고스란히 비춘다. 그는 곡을 쓰며 자신을 돌아보니 본인의 못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다른 이들 앞에선 열심히 숨기고 덮어뒀지만, 혼자 있을 때면 슬며시 고개를 드는 초라한 모습. 보통 사람이라면 계속 감출 법도 하건만, 그는 그 마음에 비친 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소박하고 평범한 언어로 쓰인 노랫말엔 어떠한 포장도, 가식도 없다. 애써 아름답게 보이려 하지 않은 탓에 다소 투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리 대단한 가사라도 음악에 붙지 않는다면 소용없다. 그런 점에서 [갈대]는 탁월한 설득력을 확보한다. 정교하고 섬세한 음악 덕분이다. 박현서는 건반 악기를 중심으로 포크부터 보사노바, 가요 발라드까지 다양한 스타일을 유연하게 오가며 듣는 이를 끌어당긴다. 송라이터로서의 재능이 앨범 곳곳에서 빛난다. 구성미에 중점을 둔 곡과 선율이 두드러지는 곡을 균형 있게 배치해 흡수력을 높였다. 수록곡 전반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한 반음, 노랫말만큼이나 꾸밈없이 순수한 가창도 인상적이다.
피아노 한 대로 이루어진 첫 곡 ‘갈대’를 보자. 박현서는 스스로를 ‘쉴 곳 없는 / 잠 못 드는 / 정처 없는’ 존재로 묘사한다. 음악에선 불안정한 정서를 표현하듯 반음을 적극 동원해 위태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는 하루하루 힘없이 휘청이고 바람에 무섭게 흔들리는 갈대다. 피아노 사이의 여백을 희미한 신시사이저로 채운 ‘숨겨온 나’에선 마음속 공허감과 불안을 토로한다. 그는 앨범의 시작부터 어둡고 연약한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러나 박현서의 [갈대]는 흔한 패배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간결하고 팝적인 ‘매일 밤’이 증거다. 노래에서 그는 자신의 심연을 인정하는 동시에 거부한다. 쉽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책하는 한편, “이 소리 없는 어둠 속에 잠기고 싶지 않아”라며 암흑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앨범의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음악부터 한결 밝아진 ‘여행’은 그가 변화를 위해 떼는 첫걸음이다. 그는 산뜻한 보사노바에 맞춰 자신을 괴롭히는 것들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끝없고 철없는 생각의 물결에 여전히 힘들고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떠나보겠다는 말을 되뇐다. 멜로디가 따뜻한 재즈풍의 ‘친구들’은 자신과 또 다른 갈대들을 다독이는 노래다. 그는 “마음이 힘들 때면 너는 나를, 나는 너를 떠올리자”며 서로를 위로한다. 앨범의 다른 노래와는 달리, 이 곡에서만큼은 그가 스스로를 탓하고 낮추지 않는다. 그만큼 현재 그를 온전케 하는 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연대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도 그를 일으켜 세운다. 각기 다른 음악 색을 지닌 ‘너를 향하고 있어’, ‘당신이 그린 그림’, ‘너’는 수줍지만 분명하게 고백하는 사랑 노래다. ‘너를 향하고 있어’에서 그는 ‘너’를 향하자 빛이 자신을 반긴다고 한다. 어둠에 잠기고 싶지 않다던 그가 빛을 찾았다니 얼마나 감격스러운 장면인가. 밴드와 함께 리듬 앤드 블루스의 맛을 낸 이 곡에선 음악가로서 과감한 시도가 엿보인다.
‘당신이 그린 그림’은 단연 앨범의 킬링 트랙이다. 시작과 동시에 복고 분위기를 연출하는 키보드 전주부터 강력하다. 물 흐르듯 유려한 선율과 반음을 활용한 독특한 스케일, 감정을 고조시키는 브리지의 다이내믹까지 순간순간이 매혹적이다. 구성과 작법 측면에서 유재하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1987)부터 1990년대 초반의 서정적인 가요 곡들이 떠오르는 ‘당신이 그린 그림’은 대중을 사로잡을 만한 매력을 지녔다.
마침내 사랑하는 이와 마주한 ‘너’는 여느 곡보다 솔직하고 직접적이다. 그는 볼품없는 스스로를 멋쩍어하면서도 언제나 자신의 편이 되어주던 ‘너’에게 같이 있어 달라고 말한다. 마이너와 메이저를 오가는 음계와 감칠맛을 더하는 반음, 세밀하고도 힘 있는 연주가 곡의 메시지를 강조한다. 신을 향해 기도하듯 경어로 쓰인 ‘노래를 불러요’는 마치 이 이야기의 에필로그처럼 들린다. 방황하던 스물다섯 청년은 감히 이해할 수 없는 큰 사랑 앞에 엎드려 노래하며 내면의 평안을 빈다.
아티스트의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앨범이다. 이제 막 나온 1집을 들으면서 앞으로 박현서가 써 내려갈 이야기와 음악이 궁금해진다. 20대 초반 긴 터널에서 헤맨 끝에 [갈대]를 낸 그는 어떤 20대 중후반을 보내고 어떤 어른으로 성장할까. 어쩌면 당장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을 것이다.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불안하고 때때로 외로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갈대]의 박현서라면 언제든 그만의 건강한 방법으로 어려움을 헤쳐가리란 확신이 생긴다. 촉망받는 신예가 출발선에 섰다.
한 달 전쯤 글을 부탁받고 음악을 쭉 들으면서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음악적으로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가사가 인상적이었어요. 지극히 현실적이고 꾸밈없이 솔직한 노랫말에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달까요.
[갈대]를 들으면서 막연한 불안에 휩싸이고 건조한 마음을 남몰래 다독이던 20대 초반의 제 모습이 자꾸 떠올랐어요. 그때의 제가 이 앨범을 들었다면 많이 공감하고 위로받았을 텐데. 이제는 그 시간을 지나온 입장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 나누고 싶어 예정에 없던 인터뷰도 진행했어요.
아래는 앨범을 듣고 가장 먼저 써뒀던 글인데, 어디에도 싣지 못하고 갖고 있다가 공유합니다.
“척박한 땅에서 자라는 갈대는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쉽게 꺾이거나 뽑히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곁엔 늘 함께 흔들리는 또 다른 갈대들이 있다. 덩그러니 홀로 서 있는 갈대는 없다. 스스로가 갈대처럼 느껴진다면 꽤 괜찮은 인생을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삶의 풍파에 흔들리며 불안할 때면 주위를 둘러보라. 어느새 함께 흔들리는 주변 갈대들과 장관을 이루고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