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뛰어넘는 음악의 감동
잠시 첫사랑을 떠올려보자. 예상치 못한 첫 만남과 ‘심쿵’, 수줍게 건넨 첫인사, 고민 끝에 어렵사리 뗀 말문. 순간 머릿속은 백지가 되고 자신도 모르게 ‘아무 말’이 나온다. 난생처음 느끼는 설렘과 연정은 사람을 비정상의 상태로 몰아간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외는 없다. 아일랜드의 영화감독 존 카니(John Carney)도 그랬다. 그는 관심 있는 이성에게 말 한 번 제대로 걸어보지 못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영화를 만들었다. 첫사랑을 위해 밴드까지 하게 된 한 소년의 이야기, [싱 스트리트(Sing Street)](2016)다.
첫사랑의 설렘과 노래를 만드는 즐거움, 영화 [싱 스트리트](2016)
[싱 스트리트]는 존 카니 감독의 일곱 번째 장편 영화다. 감독 데뷔 전 아일랜드의 밴드 더 프레임스(The Frames)에서 베이시스트로 활동했던 그는 음악 영화를 만들면서 명성을 얻었다. [싱 스트리트] 이전에 연출한 [원스(Once)](2007), [비긴 어게인(Begin Again)](2014)이 그를 세계적인 감독 반열에 올렸다. 지극히 현실적인 음악인의 삶을 보여주면서도, 영화적 매력이 가득한 스토리가 관객을 사로잡았다. 흡수력 높은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성공 요인이다.
감독의 역량은 세 번째 음악 영화인 본 작에서 무르익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을 모티프로 한 이야기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자아냈다. 극 중 배경에 걸맞은 선곡과 영화를 위한 창작곡의 밸런스도 탁월했다. 모터헤드(Motörhead), 더 큐어(The Cure), 듀란 듀란(Duran Duran), 아하(A-ha) 등 당대를 수놓은 가수들의 곡이 대거 등장했고, 1980년대를 상징하는 뉴 웨이브 스타일 음악이 사운드트랙의 주를 이뤘다. 실제 음악을 하는 무명의 어린 배우들을 기용해 리얼리티를 높인 것 역시 영리한 선택이었다.
[싱 스트리트]의 음악은 존 카니 감독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다. 감독은 영화 제작 초기부터 작곡가 섭외에 공을 들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극의 배경이자 자신이 몸소 경험한 1980년대에 활동했던 작곡가를 찾던 중, 어린 시절 즐겨 들었던 팝 밴드 대니 윌슨(Danny Wilson)의 멤버 게리 클라크(Gary Clark)를 떠올렸다. [원스]를 인상 깊게 봤던 게리 클라크는 흔쾌히 [싱 스트리트]의 제작에 합류했고, 감독의 의도대로 1980년대풍의 사운드트랙 7곡을 선사했다. 여기에 [원스]의 글렌 핸사드(Glen Hansard)와 [비긴 어게인]의 애덤 르빈(Adam Levine)이 엔딩 곡에 참여해 힘을 보탰다.
섬세한 연출로 빚어낸 만듦새엔 호평이 이어졌다. 비록 스타 캐스팅으로 무장한 전작 [비긴 어게인]의 상업적 성공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평단의 반응은 여느 때보다 뜨거웠다. ‘롤링 스톤(Rolling Stone)’, ‘버라이어티(Variety)’, ‘가디언(The Guardian)’ 등 영미의 언론은 첫사랑의 설렘과 10대의 성장 이야기를 완성도 높은 음악과 함께 그린 것에 찬사를 보냈다. 감독 자신의 만족도도 높았다. 그는 “[싱 스트리트]를 만들며 소원 성취했다!”고 회고하며 “그 나이에 하고 싶었지만 결국 하지 못했던 것들을 영화에 담았다.”고 흡족해했다.
국내 관객들에게도 본 작은 각별하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싱 스트리트]에 가장 열렬한 지지를 보낸 국가다. 57만 명이 넘는 관객이 극장에서 본 작을 관람했다. 작품의 전체 박스 오피스 중 약 3분의 1이 한국에서 나왔다. 심지어 본국인 아일랜드보다 더 큰 수익을 안겼다. 퍼디아 월시-필로(Ferdia Walsh Peelo), 마크 맥케나(Mark McKenna) 등 주연 배우들의 팬덤이 생기는가 하면, 라디오에선 영화의 주요 사운드트랙이 심심찮게 흘러나왔다. 존 카니 감독이 자란 곳이자 영화의 배경이 된 더블린의 ‘싱 스트리트(Synge Street)’에 가면 반드시 한국인 관광객을 만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영화를 뛰어넘는 음악의 감동, 뮤지컬 [싱 스트리트](2020)
오늘날 이와 같은 웰메이드 음악 영화의 뮤지컬 재탄생은 필연적이다. 디즈니의 1994년 애니메이션 영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라이온 킹(The Lion King)](1997)의 대성공 이후 2000년대 브로드웨이의 주요 경향은 ‘무비컬’이었다. 영화 원작의 뮤지컬을 뜻하는 무비컬은 충분히 검증된 내러티브와 음악으로 흥행 부담은 줄이면서 오리지널 신작과의 경쟁력을 확보해왔다. 존 카니의 출세작 [원스] 또한 지난 2012년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로 다시 태어났고, 그해 토니상(Tony Award)에서 8개 부문을 휩쓸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뮤지컬 [싱 스트리트]에 상당한 이목이 쏠린 이유다.
작품은 지난해 12월 말 뉴욕의 오프브로드웨이(Off-Broadway)에서 첫선을 보였다. 브로드웨이에 오르기 전 규모가 작은 극장에서 작품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막바지 준비를 마치기 위해서다.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영화의 이야기를 뮤지컬에 맞게 첫사랑과 음악 활동을 중심으로 정돈한 것이 주효했다. 독창적인 연출법과 음악에 관한 한 만장일치의 극찬이 나왔다. 음악 하나만으로도 티켓을 구입할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음악만큼은 영화보다 무대의 버전이 훨씬 매력적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배우들의 생동감 넘치는 밴드 라이브와 함께 진행되니 이러한 감상도 무리는 아니다.
높아진 주연 배우의 연령도 주목할 부분이다. 2016년 영화 개봉 당시 주인공 코너 로울로 역을 맡았던 퍼디아 월시-필로(1999년생)가 우리 나이로 열여섯이었던 것과 달리, 뮤지컬에서 코너 역을 맡은 브레녹 오코너(Brenock O’Connor)는 2000년생, 우리 나이로 올해 스물한 살이다. 영화가 변성기 소년의 깨끗한 미성을 담았다면, 뮤지컬에선 한층 성숙하고 호소력 짙은 보컬이 관객과 마주한다. 어린 시절부터 미국 HBO 채널의 인기 드라마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 등에 출연하며 연기력을 다진 브레녹 오코너는 때로는 천진하게, 때로는 서정적으로 노래하며 그만의 코너 로울로를 창조했다.
뮤지컬 [싱 스트리트]는 영국의 뉴 웨이브 밴드 디페시 모드(Depeche Mode)의 1981년 노래 ‘Just Can’t Get Enough’로 막을 연다. 출연진이 각자 텔레비전으로 당시 영국의 인기 음악 프로그램이었던 ‘Top of the Pops’를 시청하던 중 사회자가 디페시 모드의 ‘Just Can’t Get Enough’를 소개하면 [싱 스트리트] 버전의 노래가 시작되는 것이다. 원작 영화에는 없던 장면이다. 작품은 배경에 대한 긴 설명 대신 당시의 인기곡을 부름으로써 손쉽게 관객들을 1980년대로 데려간다.
이후의 수록곡은 대부분 영화에서 익히 들은 곡이다. 편곡에도 거의 변함이 없다. 주인공 코너는 모델 지망생 소녀 라피나에게 첫눈에 반하곤 그와 친해지기 위해 자신이 밴드를 하고 있단 거짓말을 한다. 그렇게 엉겁결에 만들어진 밴드 싱 스트리트가 처음으로 녹음한 곡이 ‘Riddle of the Model’이다. 작곡가 게리 클라크가 의도적으로 아마추어처럼 만들었다고 밝힌 바 있는 노래는 신시사이저의 단순하고도 반복적인 연주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유튜브에 뮤지컬 장면을 갈무리해 공개했던 ‘Up’에는 라피나를 향한 코너의 풋풋한 연정이 잘 묻어나 귀엽다.
“절대 적당히 해선 안 돼. 알아들었어?”라는 라피나의 명대사를 남긴 ‘A Beautiful Sea’는 여전히 근사하다. 경쾌한 키보드 장식이 돋보이는 파워 팝에서 라피나는 바다를 배경으로 코너와 함께 노래를 부르며 존재감을 뽐낸다. 덕분에 노래는 영화 속 원곡보다 훨씬 발랄하게 들린다. ‘Dream for You’는 애초에 영화를 위해 만들어졌으나 끝내 수록되지 않았는데, 마침내 뮤지컬에 쓰이면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노래를 만든 게리 클라크는 이 곡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쓰이게 되어 기쁘다는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작품을 대표하는 ‘Drive It Like You Stole It’은 화려하고 웅장한 연출로 보는 이의 눈과 귀를 동시에 휘어잡는다.
음악적 하이라이트는 ‘To Find You’다. 영화에선 코너가 꿈을 찾아 런던으로 떠난 라피나를 그리워하며 불렀는데, 앳된 음색에 곡의 감정선이 다소 희석되어 아쉬움을 남겼다. 브레녹 오코너의 ‘To Find You’는 다르다. 그는 묵직하고도 두께감 있는 목소리로 노래의 잠재력을 오롯이 표현했다. 감독 존 카니와 작곡가 게리 클라크 역시 브레녹 오코너가 새로이 해석한 ‘To Find You’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의 보컬 톤은 펑크(punk) 넘버 ‘Girls’와 ‘Brown Shoes’에서도 빛난다. 희망의 찬가 ‘Go Now’가 피날레와 어울리는 힘찬 편곡과 함께 울려 퍼지면 극은 막을 내린다.
당초 예정대로라면 이미 브로드웨이에 걸렸어야 할 작품이다. 제작진은 4월 19일부터 정식으로 공연하려고 했으나, 코로나 19 확산으로 인해 6월 이후로 개막을 미룬 상태다. 현재로서 본 음반은 뮤지컬 [싱 스트리트]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뜻밖의 상황으로 곤경에 처했지만, 앨범에 담긴 음악의 즐거움과 감동이 원작 이상으로 뛰어나 관객의 기대감을 높이기엔 충분하다. 상대적으로 영화의 성과가 미미했던 미국 현지에서는 개막 이후 영화의 재발견 흐름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2005) 이후 최고의 소년 뮤지컬을 본다.
* 본 해설지가 실린 뮤지컬 [싱 스트리트] OST의 한국 라이센스 앨범은 당초 6월 초 발매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사태로 브로드웨이 개막이 지연되면서 앨범 발매 역시 잠정 연기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