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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Jan 18. 2020

[작은 아씨들]

영화 [작은 아씨들]을 빛낸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음악

Alexandre Desplat [Little Women]



영원한 고전 [작은 아씨들]이 스크린에 돌아왔다. 현대판으로 복각된 2018년 클레어 니더프루엠(Clare Niederpruem) 감독의 버전을 제외하면 25년 만이다. 미국의 작가 루이자 메이 알코트(Louisa May Alcott)의 1868년 원작 소설은 긴 세월 동안 당대의 여성들과 교감했다. 시대와 국적을 막론하고 지구촌의 많은 소녀가 마치(March) 가문의 네 자매에게 영감을 받았다. 메그(Meg), 조(Jo), 베스(Beth), 에이미(Amy)의 자매애와 이들의 삶 속 여성 인권, 여성 연대의 이야기는 150여 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시대의 걸작답게 작품은 여러 번의 재탄생을 겪었다.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로 각각 여섯 번의 리메이크가 이뤄졌고, 심지어 뮤지컬과 오페라로도 만들어져 무대에 올랐다. 그중 위노나 라이더(Winona Ryder)와 수잔 서랜든(Susan Sarandon), 크리스찬 베일(Christian Bale) 등이 출연한 질리안 암스트롱(Gillian Armstrong) 감독의 1994년 영화는 국내에서도 큰 사랑을 받으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작은 아씨들]의 일곱 번째 영화인 본 작이 개봉하기 전까지, 1994년 버전은 원작에 충실한 마지막 영화였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시얼샤 로넌, 플로렌스 퓨, 그레타 거윅


네 자매에게 다시 한번 숨을 불어넣은 감독은 그레타 거윅(Greta Gerwig)이다. 영화 [프란시스 하(Frances Ha)](2012)의 주연 배우로 먼저 주목받은 그는 2017년 첫 단독 연출작 [레이디 버드]로 단숨에 촉망받는 신인 감독으로 떠올랐다. 유망주의 신작에는 이미 [레이디 버드]에서 그와 호흡을 맞춘 시얼샤 로넌(Saoirse Ronan)을 비롯해 엠마 왓슨(Emma Watson), 플로렌스 퓨(Florence Pugh), 티모시 샬라메(Timothée Chalamet) 등 쟁쟁한 대세 배우들이 합류하며 화제를 모았다. 메릴 스트립(Meryl Streep), 로라 던(Laura Dern)의 캐스팅 역시 관심을 높였다.


기대 속에 제작된 작품은 평단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미국 영화 연구소(American Film Institute)와 [타임(Time)],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 [할리우드 리포터(The Hollywood Reporter)], [가디언(The Guardian)] 등 영미의 수많은 유력 매체가 ‘올해의 영화’ 중 하나로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을 꼽았고, 골든 글로브(Golden Globe Awards)를 비롯한 대다수의 시상식이 주요 후보에 작품을 올렸다. 보스턴, 플로리다, 시카고, 뉴욕, 워싱턴 D.C.의 비평가 협회상에선 이미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Academy Awards)에서도 다수의 후보 지명을 기대하고 있다. 많은 비평가는 그레타 거윅만의 창의적인 재해석과 배우들의 호연을 높이 평가하며 지금까지의 [작은 아씨들] 중 가장 뛰어난 영화라는 찬사를 보냈다.


일치된 호평을 끌어낸 데는 완성도 높은 영화음악의 역할도 컸다. 감독은 본 작을 구상할 때부터 음악을 스토리텔링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했다고 전해진다. 음악적으로 만들고 싶었다는 얘기다. 그는 인위적이고 과장된 연출, 연기 없이도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를 충분히 담기 위해선 음악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감독에겐,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화의 곡을 써줄 ‘음악의 천재’가 필요했다. 이내 그가 떠올린 인물은 바로 프랑스 출신 작곡가 겸 영화음악 감독 알렉상드르 데스플라(Alexandre Desplat)였다.


알렉상드르 데스플라


알렉상드르 데스플라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8),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2010), [킹스 스피치](2010) 등의 작품을 음악으로 빛냈던 실력자다. 아카데미 시상식 역시 그가 작업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과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7)에 베스트 오리지널 스코어상을 수여하며 그 솜씨를 공인했다. 대중음악 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한 명인 퀸시 존스(Quincy Jones)는 그를 “요즘 활동하는 작곡가 중 가장 놀라운 작곡가”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그레타 거윅의 초청으로 [작은 아씨들]에 합류한 그는 웰메이드 오리지널 스코어로 영화의 품격을 올렸다. 


음악가는 언젠가 “음악이 영화에 깊이를 더할 수 있다”며 “영화를 벗어나서도 독자적으로 들을 가치가 있는 음악을 추구한다”는 소신을 밝힌 적이 있다. 한스 짐머(Hans Zimmer)도 비슷한 말을 했다. “엔니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와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의 음악이 그렇듯, 영화음악은 그 자체만으로도 영화를 뛰어넘는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리 골드스미스(Jerry Goldsmith) 또한 자신이 만든 음악이 영화에서 확실히 들리길 바란다고 말했다. 영화음악에 관한 이들의 철학은 “영화음악은 영화에 도움이 되기 위해 존재한다”던 레이첼 포트만(Rachel Portman)과는 정반대에 위치한다.


그래서일까.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음악에선 때때로 기라성 같은 거장들의 영향이 감지된다.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주선율을 다루는 방법에선 엔니오 모리꼬네가, 웅장한 편성 가운데서도 관객에 각인될 만한 선율을 강조하는 작법에선 존 윌리엄스가 떠오르는 식이다. 현을 잘게 운용하며 다이내믹을 형성할 때는 언뜻 한스 짐머가 겹치기도 한다. 데스플라는 네 자매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그려내기 위해 두 대의 피아노를 중심으로 실내악단을 꾸렸다. 스트링이 밀도 높은 연주로 음향을 채우는 동안, 피아노는 명징한 소리로 멜로디를 그리며 귀를 잡아끈다. 영화적 연출과 음악의 매력을 동시에 충족하는 영리한 짜임새다.


'Little Women'


사운드트랙의 첫 곡 ‘Little Women’부터 상당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현악기의 경쾌하고 리드미컬한 질주가 도입부를 장식하더니, 어느새 하프와 피아노가 전면에서 분위기를 전환하고, 또 다시 스트링이 앞질러 나가며 듣는 재미를 자아낸다. 불과 3분 남짓한 오프닝 트랙은 여러 테마를 조화하면서도 주제부를 선명하게 활용해 영화에 대한 관객의 흥미를 자극한다. 마이너 스케일에서의 유려한 진행이 돋보이는 ‘Plumfield’, 플루트의 감초 역할이 두드러지는 ‘The Beach’도 인상적이다.


‘Dance on the Porch’와 ‘Ice Skating’ 역시 현악기의 활약이 빛나는 곡이다. 스트링의 탄력 있는 강약 조절로 빼어난 선율을 들려주는 ‘Dance on the Porch’는 음악에 걸맞은 생생한 화면과 함께 관객을 매료할 곡이다.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평화롭게 주도하는 전반부와는 달리, 후반부로 갈수록 현악기의 사나운 트레몰로가 몰아치며 극도의 긴박감을 조성하는 ‘Ice Skating’은 극 중 에이미에게 벌어진 치명적인 사고 장면에서 효과음의 역할을 톡톡히 했을 것으로 보인다. 남북전쟁에서 상처를 입고 돌아온 아버지와 재회하는 장면에 쓰인 ‘Father Comes Home’은 사운드트랙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 중 하나다.



아티스트의 재능과 개성이 특히 엿보인 곡은 ‘Telegram’이다. 오케스트레이션은 정교하게 짜였고, 반복되는 캐치한 모티프는 팝 멜로디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귀에 잘 들어온다. 1분여의 ‘Laurie and Jo on the Hill’에선 짧은 구성 중에도 뚜렷한 기승전결과 서정적인 선율로 듣는 이를 매혹한다. 멜로디를 그리는 섬세한 피아노 터치와 현의 앙상블이 눈에 띄는 ‘The Letter’, 눈 내린 정원에서의 설렘을 생기 가득하게 담은 ‘Snow in the Garden’ 역시 음악적인 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곡이다. 여느 곡보다 생동감 넘치는 구성과 진행으로 대미를 장식하는 ‘It’s Romance’에 이르면 음악만으로도 한 편의 영화가 완성된다.


알렉상드르 데스플라는 음악 작업 후 감독 그레타 거윅의 신선한 관점과 연출, 배우들의 명연기를 높이 사며 만족감을 나타냈다. 그레타 거윅의 소감은 그 이상이다. 그는 자신 같은 신인 감독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고 이견을 조율하며 결과물을 만들어나가는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모습이 감명 깊었다며, 작곡가와 일하는 법을 배운 꿈같은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몇 번의 기적과도 같은 일들 끝에, 나는 마침내 알렉상드르 데스플라가 만든 스코어를 갖게 됐다. 제작 과정에서 수백 번도 넘게 들은 음악이지만, 여전히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다!” 감독의 말이다.


퀸시 존스는 “좋은 영화음악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녹인다”고 했다. 이 말에 따르면,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작은 아씨들] 사운드트랙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수작이다. 영화 관람 전 음악을 먼저 들은 입장에서 단언한다. 앨범은 평소 그의 작품관대로 영화와는 별도의 감상을 풍요롭게 제공한다. 현재 많은 매체와 시상식이 본 작을 논할 때 상찬의 대상으로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음악을 빠트리지 않는 이유다. 음악을 듣고 있으니 25년 만에 부활한 마치 가문의 네 자매를 하루빨리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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