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 가수 리암 페인의 첫걸음
팝 역사상 구성원 전원이 성공적인 솔로 활동을 펼친 보이 밴드는 드물다.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홀로서기에 도전한 가수 중 절대다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의 영광을 잃어버렸다. 원 디렉션(One Direction)은 다르다. 2011년 데뷔 이래 2015년까지 쉼 없이 세계를 누빈 이들은 팀이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각자도생에 나섰고, 무사히 궤도에 올랐다. 높은 명성에 의존하는 단순한 전략이 아닌, 음악적으로 뚜렷한 개성을 장착한 것이 특징이었다. 보이 밴드 시절과는 또 다른 해리 스타일스(Harry Styles)의 소프트 록, 나일 호란(Niall Horan)의 포크 팝, 루이 톰린슨(Louis Tomlinson)의 팝 록, 그리고 리암 페인(Liam Payne)의 댄스 팝이 대중을 사로잡았다.
네 멤버의 솔로 데뷔는 비슷한 시기에 이뤄졌다. 나일 호란과 루이 톰린슨은 2016년, 해리 스타일스와 리암 페인은 2017년에 각각 출사표를 던졌다. 그중 리암 페인의 행보가 예상을 벗어났다. 해리 스타일스와 나일 호란은 히트 싱글을 내고 단기간에 음반을 발매했지만, 리암 페인의 앨범은 거듭 미뤄졌다. 당초 2018년 1월 출시를 계획했으나, 완성도에 공을 들이며 제작 기간이 길어진 것이다. 작업에 한창이던 그는 2018년 8월에 4곡이 실린 EP [First Time](2018)을 공개하며 팬들의 마음을 달랬다. 2017년 5월 첫 솔로 싱글 ‘Strip That Down’을 발표한 이래 그가 낸 노래는 무려 8곡에 이른다.
대망의 정규 1집 [LP1]은 지난 9월에 완성됐다. 마침내 앨범 소식을 전하게 된 리암 페인은 2019년 대부분의 시간을 스튜디오에서 보냈다는 말로 그동안의 노력을 설명했다. 베일에 싸인 음반에 관해선 “의도한 대로 작품이 만들어져 자랑스럽다. 내가 1집에서 들려주고 싶었던 음향을 정확히 담았다. 어셔(Usher), 저스틴 팀버레이크(Justin Timberlake), 크리스 브라운(Chris Brown) 등, 내가 좋아해 온 뮤지션들이 생각날 듯한 지점도 있다.”고 귀띔하며 기대감을 높였다. 긴 시간을 기다려준 팬들을 향한 사과와 감사의 말도 빼놓지 않았다. 한편으론 앞서 공개한 노래들이 그의 기대를 뛰어넘는 성과를 거뒀다며 기쁨을 드러내기도 했다.
“내가 원 디렉션이었던 건 알지? 이제 난 자유로워.
사람들은 내게 한 가지 면만 바랐어. 난 그렇지 않은데 말이야.
난 내 원래 모습을 바꾸지 않을 거야. 난 그저 즐기고 싶을 뿐이야.
한바탕 놀아보고 싶다고.”
- ‘Strip That Down’, Liam Payne
데뷔 앨범 [LP1]을 위해 내로라하는 음악인들이 대거 모였다. 곡 작업에 참여한 이들만 해도 블록버스터 수준이다. 에드 시런(Ed Sheeran), 라이언 테더(Ryan Tedder), 제드(Zedd), 찰리 푸스(Charlie Puth)를 비롯한 수십 명이 작곡가로, 스티브 맥(Steve Mac), 더 몬스터스 앤 더 스트레인저즈(The Monsters and the Strangerz), 스타게이트(Stargate) 등의 히트 메이커가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렸다. 퀘이보(Quavo), 어 부기 윗 다 후디(A Boogie wit da Hoodie), 리타 오라(Rita Ora), 제이 발빈(J Balvin) 등의 뮤지션들은 게스트로 힘을 보탰다. 이처럼 힙합과 알앤비, 팝과 일렉트로닉, 레게를 아우르는 호화 라인업이 [LP1]의 기반을 다졌다.
리암 페인은 앨범의 보컬리스트인 동시에 디렉터다. 그가 창작자로 임한 노래는 단 4곡에 불과하지만, 음반의 방향을 정한 건 명백히 아티스트 자신이다. 그는 앨범의 윤곽이 채 잡히기도 전인 2017년 여름에 알앤비, 댄스 팝의 모범이 된 저스틴 팀버레이크의 [Justified](2002), 어셔의 [Confessions](2004) 같은 음악을 만들겠다는 구상을 밝힌 바 있다. 오래전 가수를 꿈꾸며 그가 동경했던 우상을 향한 경의의 표현이자, 그들과 같은 음악을 경험한 적 없는 지금 세대에게 신선한 감상을 주기 위한 목적이었다. 저스틴 팀버레이크를 연상케 하는 리암 페인의 짧은 머리와 적당히 기른 수염은 결코 우연에 의한 스타일링이 아니다.
원 디렉션 시절부터 남달랐던 그의 보컬 표현은 신보에서 더욱 농익었다. ‘Remember’, ‘Hips Don’t Lie’, ‘Say It All’ 등 차분히 박자를 타며 물 흐르듯 편안하게 노래하는 미디엄 템포에서는 어셔의 가창이, ‘Stack It Up’, ‘Strip That Down’, ‘For You’, ‘Familiar’ 등 비트를 쪼개며 랩을 하듯 댄스 리듬을 만드는 곡에선 저스틴 팀버레이크의 창법이 떠오른다. 듣기 편한 목소리 톤, 진성과 가성을 부드럽게 오가는 발성 등 탄탄한 기본기와 높은 곡 이해도를 모두 갖췄기에 가능한 해석이다. 수록곡 중 가장 서정적인 팝 발라드 ‘All I Want(For Christmas)’는 리암 페인의 풍부한 가창력을 만끽하기에 알맞다.
17곡으로 이루어진 음반은 크게 두 파트로 나뉜다. 앨범의 전반부는 미디엄 템포, ‘Strip That Down’을 기점으로 하는 후반부는 업 템포 댄스가 중심을 잡는 식이다. 작곡에 참여한 에드 시런의 흔적이 짙은 ‘Stack It Up’, 트랩 비트에 매끄러운 선율을 접목한 ‘Heart Meet Break’, EDM의 문법을 동원한 ‘Hips Don’t Lie’와 ‘Tell Your Friends’는 느긋한 리듬과 어울리는 리암 페인의 그루브가 인상적인 곡이다. 그와 라이언 테더가 작곡가로서 머리를 맞댄 ‘Say It All’, 디제이 트리오 치트 코즈(Cheat Codes)가 함께한 ‘Live Forever’는 힙합과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조합하고 잘 들리는 후렴을 배치해 듣는 이의 반복 감상을 이끈다.
‘Stack It Up’을 제외하면 사전에 공개된 곡이 없던 초반 10곡과 달리, 후반의 7곡은 모두 앨범에 앞서 발매되어 좋은 반응을 얻었다. ‘만약 저스틴 팀버레이크가 2017년에 데뷔 싱글을 냈다면 어땠을까?’라는 콘셉트에서 출발했다는 앨범의 첫 싱글 ‘Strip That Down’은 에드 시런이 작곡과 코러스, 힙합 트리오 미고스(Migos)의 퀘이보가 랩 파트를 맡아 듣는 재미를 키웠다. 노래는 미국 10위, 영국 3위, 호주 2위 등에 오르며 솔로 가수 리암 페인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일렉트로닉 팝의 형식을 따르면서 리타 오라(Rita Ora)와 근사한 하모니를 들려준 ‘For You’는 영화 [50가지 그림자: 해방](2018)의 사운드트랙 앨범에 실려 인기를 끌었다.
아티스트의 팔색조 매력은 앨범 후반에 이를수록 선명해진다. ‘Familiar’에선 콜롬비아 출신의 제이 발빈과 라틴 팝을 부르며 의외의 케미스트리를 뽐내는가 하면, 영국의 DJ 조너스 블루(Jonas Blue)와 2012년부터 2018년까지 방영된 미국의 인기 음악 드라마 [내슈빌]에서 활약한 레논 스텔라(Lennon Stella)가 함께한 ‘Polaroid’, 인기 DJ 제드(Zedd)와 손을 잡은 ‘Get Low‘에선 트렌드에 걸맞은 일렉트로닉 댄스 팝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노래를 만든 찰리 푸스 특유의 선율감이 돋보이는 ‘Bedroom Floor’에선 섹시한 무드를 연출하는 가성으로 곡을 소화했는데, 녹음 현장을 지켜보던 찰리 푸스는 리암 페인의 완벽한 가창에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솔로 가수 리암 페인의 첫걸음
리암 페인은 저스틴 팀버레이크의 후예를 자처한다. 2010년대에 들어 저스틴 비버(Justin Bieber), 숀 멘데스(Shawn Mendes), 찰리 푸스, 트로이 시반(Troye Sivan) 등이 저마다의 캐릭터로 세력을 키웠지만, 알앤비와 일렉트로니카, 힙합에 기초한 팀버레이크의 팝 계보는 한동안 끊겨 있었다. 성인 남성의 무르익은 섹스어필을 추구하는 이도 없었다. 우상의 유산을 계승해 도약하려는 리암 페인과 그 결과물 [LP1]이 특별한 이유다. 여러 차례 발매를 미루고 많은 조력자의 손을 거친 끝에 완성한 작품은 음악 시장에 새바람을 불어넣을 만한 힘을 갖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