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콰이어 9월호 기고
인디 음악은 예나 지금이나 마니아의 영역이다. 국내에서 인디의 개념이 처음 통용된 1990년대에도 그랬고, 홍대 앞 라이브 클럽을 넘어 유튜브와 사운드클라우드로 활동의 장이 확장된 현재에도 그렇다. 설(SURL), 데이먼스 이어(Damons year), 박소은, 웨이브 투 어스(wave to earth)처럼 젊고 재능 있는 뮤지션들이 저마다의 음악 스타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이들의 활약이 대중에 가닿기란 쉽지 않다. 대중적인 히트곡을 내긴 더더욱 어렵다. 그러나 그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을 뚫고 세상에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고 차트 정상에 오른 밴드가 있다. 그룹사운드 잔나비다.
잔나비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건 2015년 무렵이다. 어느 텔레비전 드라마의 사운드트랙에서였다. 원숭이를 이르는 옛말이라던가. 재미있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1992년생 원숭이띠 청년들은 음악 팬들 사이에서 ‘이름이 특이한 훈남 밴드’로 통하고 있었다. 이름만큼이나 음악도 남달랐다. 뽐내기 위한 기교나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고, 노래마다 캐치한 멜로디가 살아 숨 쉬었다. 프런트 맨이자 보컬리스트의 색깔도 더없이 선명했다. 도무지 평범한 구석이 없는 밴드를 보며 언젠가 이들이 대중에 각인될 날이 올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다만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미처 몰랐다.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2016), ‘She’(2017)가 입소문을 타고 차츰 퍼지더니 마침내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2019)가 차트 1위에 오르면서 돌풍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의 초기 수확은 이지 리스닝에 대한 밴드의 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잔나비는 처음부터 간결하고 직설적으로 잘 들어오는 음악을 통해 대중과 호흡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잔나비는 일부 마니아와 평단의 인정에 앞서 더 많은 사람의 실질적 애청을 원했다. 아티스트라면 누구나 그럴 것 같지만, 의외로 이들처럼 이지 리스닝에 역점을 두는 인디 뮤지션은 흔하지 않다.
이지 리스닝과 함께 잔나비를 대표하는 키워드는 단연 레트로다. 그룹의 강력한 개성은 멤버들이 사랑한 과거의 문법을 토대로 생겨났다. 그렇다고 레트로 열풍에 단순 편승한 건 아니다. 이들은 수십 년 묵은 빈티지 악기까지 구해가며 철저한 연구를 통한 재현에 심혈을 기울였고, 끝내 그 시절의 음악을 지금의 감각으로 재창조했다.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의 사운드와 질감이 올드 팝의 향수를 자아낸다면, 멜로디와 구성에선 현대적인 터치로 현재의 감수성을 어루만지는 식이다. 레트로라고 해서 특정 시기의 클리셰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비틀스와 비치보이스, 퀸, 엘턴 존,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 산울림, 이문세 등 폭넓은 시대, 다양한 스타일이 오늘날 잔나비의 원료가 된다. 레트로가 이들의 본령과 다름없는 이유다.
이들이 최근 발표한 정규 3집 〈환상의 나라〉엔 밴드로서의 도약과 롱런에 대한 야심이 담겼다. 출세작의 히트 공식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부터 그렇다. 이들은 검증된 흥행 작법을 되풀이하는 대신,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그려온 음악 세계를 마음껏 구현하는 데 집중했다. 2집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의 꿈같은 성공 이후의 성장담을 한 장의 콘셉트 앨범으로 풀어낸 것이다. 내러티브가 실리고 편성이 커졌을지언정 개별 곡의 흡인력과 특유의 매력적인 멜로디, 오래된 유산을 활용하는 탁월한 솜씨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정지용 시인의 ‘오월소식’에서 제목을 딴 타이틀곡 ‘외딴섬 로맨틱’은 근래 들은 가장 아름다운 노래다. 록 오페라라는 전통적인 구성법을 동원해 현재의 잔나비를 담아낸 〈환상의 나라〉는 그런 의미에서 이들이 본격적으로 펼쳐갈 음악 세계의 출발점처럼 느껴진다.
이 기획에서 잔나비를 꼽은 건 음악만으로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뮤지션이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의 인기 지표인 음원 차트와 기성세대가 주로 듣는 오전 시간대 라디오를 모두 장악한 아티스트는 손에 꼽을 만큼 적다. 둘 중 한쪽만 잡아도 성공인 시대니 과연 괄목할 만한 성과다. 복고가 일상이 된 시대에 이들의 정상 등극은 상징적이다. 밴드는 오랜 우상들에 대한 애정과 이해를 바탕으로 과거의 우물에서 자신들의 음악을 길어 올렸다. 노스탤지어를 부르는 사운드스케이프와 보편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노랫말, 쉽고 잘 들리는 선율이 이들을 레트로 흐름의 총아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오래된 미래’가 된 잔나비의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 정민재(대중음악평론가)
* 에스콰이어 9월호의 기획 기사 '신시대의 면면'에 새 시대의 목소리(!) 중 한 명으로 참여했어요. 저는 뮤지션 분야를 맡아 잔나비가 인디 밴드에서 대중을 아우르는 팀이 될 수 있었던 저력에 관해 썼습니다. 평소 좋아하던 잡지에 글을 쓰게 되어 행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