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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Jan 14. 2022

한국 사회를 이야기한 노래들

빌보드 코리아 매거진 6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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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의 가사는 밥 딜런(Bob Dylan)의 등장과 함께 깊어졌다. 주로 사랑과 이별에 머무르던 노랫말의 주제가 반전(反戰), 평화, 시대정신과 같은 정치, 사회의 영역까지 뻗어간 것이다. 밥 딜런 이후 영미(英美)의 뮤지션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상을 노래에 담아내는 데 거리낌이 없다. 지금도 그렇다. 정치적 논쟁의 여지가 있는 소재,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건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노래로 이야기한다.


국내의 사정은 조금 다르다. 우리 대중은 오래전부터 대중문화 예술인이 정치, 사회적 발언을 하는 것을 껄끄럽게 생각해왔다. 심지어 ‘딴따라’ 같은 멸칭까지 동원해가며 예술가의 표현, 활동 범위를 암묵적으로 제한했다. 대중가요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랜 가부장 문화와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는 음악이 사회를 논할 수 있는 틈을 주지 않았다. 게다가 발표되는 모든 곡을 검열하며 입맛에 맞지 않는 곡은 가차 없이 금지곡으로 지정하던 군사 정권 아래서 표현의 자유 같은 건 존재할 수 없었다. 김추자의 ‘거짓말이야’(1971)가 불신 풍조를 조장한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던 시절이니 정치, 사회적 내용의 가사가 감히 나올 수 있었겠나.


현인 '굳세어라 금순아'(1953)


가요가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한국 전쟁을 경험한 어르신이라면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1953)를 잊지 못한다. 흥남 철수 작전과 피난민의 고된 삶을 그려낸 노래는 한국의 격동적인 현대사를 담아낸 영화 [국제시장](2014)에서 김필, 곽진언의 커버 버전이 사운드트랙으로 쓰였을 만큼 역사적인 곡이다. 가요 역사에서 처음으로 산업 재해를 소재로 만들어진 남인수의 ‘사백환 인생비극’(1960)은 어떤가. 1960년 3월 2일 부산 국제고무공장에서 발생한 화재로 일당 400환(圜)을 받고 일하던 여공 62명이 목숨을 잃은 비극적인 사건을 사람들은 잊었을지언정, 노래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1968년 장발 차림으로 뉴욕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이듬해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리사이틀을 열었던 한대수는 몸소 한국 포크 음악의 신기원이 됐다. 한대수 이전 국내에는 번안곡이 사실상 통기타 음악의 전부였다. 다들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 밥 딜런, 조안 바에즈(Joan Boez) 등의 노래를 불렀다. 한대수는 달랐다. 그는 괄괄하고 투박한 목소리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담아 노래했다. 1969년에 만들고 1974년 첫 앨범에 수록한 ‘물 좀 주소’(1974)는 시대가 답답해서, 그가 사는 집안과 사회가 답답해서 목마름을 삼키며 만든 곡이었다. 그러자 군사 정권은 이 곡을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는 해괴한 이유를 들며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이어서 이듬해 2집마저 몽땅 금지곡이 되고 앨범이 전량 수거되자 시대를 앞서간 그는 실의에 빠져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만다.


한대수 [멀고 먼 길](1974 | 김민기 [김민기](1971)


한대수 이후 한국 포크 시장에는 번안 아닌 자작곡이 주를 이뤘다. 포크 가수라면 마땅히 자신의 말과 노래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미덕이 됐다. 그 변화의 흐름에는 김민기도 있었다. 그는 1971년 ‘아침이슬’을 포함한 자작곡 8곡 등 총 11곡이 담긴 1집 앨범으로 한국 포크의 문을 열었다. 김민기의 노래를 널리 알린 건 양희은이었다. 같은 해에 나온 양희은의 1집에도 실린 ‘아침이슬’은 청아하고 단단한 양희은의 음성을 타고 젊은 세대에게 퍼져 나갔다. 마치 노랫말 속 ‘긴 밤’을 통과하는 것 같았던 대중은 이 곡을 새로운 날을 열망하는 희망가이자 민중의 노래로 받아들이고 불렀다. 결국 군사 정권의 심기를 거스른 ‘아침이슬’은 아무 이유도 없이 금지곡이 됐지만, 그로써 역설적으로 민주주의의 송가가 됐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길었던 군부 독재가 막을 내리면서 가요계의 숨통도 트였다. 1987년 8월 18일, 공연금지해제조치를 통해 ‘아침이슬’ 등 금지곡 186곡의 족쇄가 풀린 것이다. 그러자 음지에서 활동하던 ‘노래를 찾는 사람들’, 이른바 ‘노찾사’가 수면 위로 떠 올랐다. 본래 서울대, 이화여대 등 각 대학의 노래패가 모여 ‘노래모임 새벽’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던 이들은 1984년 김민기의 도움을 받아 1집을 제작했으나 유통을 하지 못했고, 대신 야학과 공단 등을 방문하며 언더그라운드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1989년 나온 노찾사의 2집에선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등이 인기를 끌었고, 사시사철 공단에서 미싱을 돌리는 노동자의 애환을 그린 ‘사계’는 국민가요에 준하는 폭발력을 보였다.


정태춘 [아, 대한민국...](1990)


1990년대는 본격적인 변화의 시기이자 아직 미흡한 것들의 변화를 촉구하는 시점이었다. 그 선봉에는 정태춘이 섰다. 그의 앨범 [아, 대한민국...](1990)은 고속 성장하던 우리 사회 이면의 갖은 치부를 송곳처럼 날카로운 말로 파헤쳤다. 동명의 수록곡 ‘아, 대한민국...’의 가사를 보자. “아 대한민국, 아 우리의 공화국.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거짓 민주자유의 구호가 넘쳐흐르는 이 땅. 고단한 민중의 역사 허리 잘려 찢겨진 상처로 아직도 우는데.” 지금 기준으로도 과감하고 노골적인 비판이다. 우리 조국을 영원토록 사랑하겠다던 신군부 시절 정수라의 건전 가요 ‘아! 대한민국’(1983)과 제목은 같지만, 노랫말은 완전히 다른 곡이었다.


문제는 당시 우리나라에 사전심의제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모든 앨범은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제도를 거쳐야만 세상에 나갈 수 있었다. 정태춘은 사전심의제도를 단호히 거부했다.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억누른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그는 [아, 대한민국...]의 사전심의를 거부하고 카세트테이프에 자체적으로 앨범을 제작해 거리에서 판매했다. 당연히 당시 기준으로는 불법 음반이었다. 그는 3년 후에 낸 [92년 장마, 종로에서](1993) 역시 같은 방식으로 자체 제작해 판매했고, 불법 음반 제작과 사전심의제도 거부를 이유로 검찰에 기소됐다. 그러자 정태춘은 기다렸다는 듯 헌법소원을 제기하며 사전심의제도에 맞섰다.


1990년대의 또 다른 투사는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데뷔곡 ‘난 알아요’(1992)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혔던 이들은 3집에 실린 ‘교실이데아’(1994)로 당대 학생들의 대변자를 자처했다. 노랫말을 보자. “매일 아침 일곱시 삼십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리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막힌 꽉 막힌 사방이 막힌 널 그리고 우릴 덥썩 모두를 먹어삼킨/ 이 시꺼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등교 시간과 학생 숫자만 좀 달라졌을 뿐, 지금의 공교육과 입시 제도에 적용해도 어색하지 않을 가사다.


서태지와 아이들 [Seotaiji And Boys IV](1995)


서태지와 아이들의 카운터펀치는 1995년 4집에서 나왔다. 공연윤리위원회가 사전 심의한 결과에 따라 앨범 수록곡 ‘시대유감’의 가사 일부를 수정하도록 하자 서태지가 크게 반발하며 아예 가사를 전부 다 뺀 반주 트랙을 수록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불복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팬덤은 사전심의제도에 관해 다방면으로 문제를 제기했고, 마침 헌법소원을 제기하며 사전심의제 폐지에 앞장서고 있던 정태춘과 맞물려 시너지를 발휘했다. 결국 아티스트들의 표현을 제한한 사전심의제도는 1996년 사라졌다. 덕분에 세상을 향한 분노가 가사에 이글대는 ‘시대유감’도 같은 해에 싱글로 나올 수 있었다.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모두를 뒤집어 새로운 세상이 오길 바라네”, “네 가슴에 맺힌 한을 풀 수 있기를”. ‘시대유감’의 가사에 대해 서태지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청소년들이 희생된 삼풍백화점 붕괴 등 일련의 대형 참사를 보면서 기성세대의 가식과 무책임을 질타한 것뿐이다.” 그의 말처럼 이 무렵 우리 사회에는 대중에 충격과 공포를 안긴 비극적인 사고들이 잦았다. 1994년엔 성수대교가 붕괴됐고, 1995년에는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몇 년 뒤 1999년에는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씨랜드 청소년수련의 집에서 불이나 유치원생 19명을 포함해 23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디제이 디오씨(DJ DOC)의 ‘성수대교’(1995), 에이치오티(H.O.T.)의 ‘아이야!’(1999)는 각각 성수대교 붕괴와 씨랜드 화재 참사로 인한 희생자를 추모하고 사고 책임자를 비판하는 노래였다.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흐른 2014년 4월 16일. 온 국민은 절망 속에 침몰하는 세월호를 지켜봤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가 충격에 휩싸였고,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때 유희열이 용기를 냈다. 그는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며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창작곡 ‘엄마의 바다’를 공개했다. 현악 4중주와 유희열의 피아노, 자우림 김윤아의 보컬이 더해진 연주곡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방송 직후 음원 사이트를 통해 무료로 공개한 ‘엄마의 바다’에는 지금도 매년 4월 16일이면 추모의 댓글이 달린다.


루시드 폴 [누군가를 위한,](2015)


싱어송라이터 루시드 폴의 ‘아직, 있다.’(2015)는 떠난 이를 기리는 동시에 남겨진 이들을 위로하는 곡이다. “나는 영원의 날개를 달고 노란 나비가 되었어. 다시 봄이 오기 전 약속 하나만 해주겠니. 친구야,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 주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영혼이 부르는, 가슴이 너무 아픈 이야기라 오히려 노랗게 밝은 노래라’는 루시드 폴의 설명이 더없이 알맞다. 이 노래를 아무렇지 않고 담담하게 들을 수 있는 한국인은 많지 않으리라. 그런가 하면 김윤아의 ‘키리에’(2016)는 정반대로 처절하게 사무치는 슬픔이 있는 대로 폐부를 찌르는 곡이다. 그는 세월호와의 연관성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해석은 듣는 사람들의 몫”이라면서도 “4월이 가기 전에 꼭 들려드리고 싶었다.”고 답한 바 있다. 표현의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루시드 폴과 김윤아의 의도는 위로와 공감이었을 것이다.


해외에선 정상급 가수들의 자선 노래하면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과 라이오넬 리치(Lionel Richie), 퀸시 존스(Quincy Jones)의 프로젝트 그룹 유에스에이 포 아프리카(USA for Africa)가 부른 ‘We Are The World’(1985)부터 떠올린다. 영국 출신 밴드 에이드(Band Aid)의 ‘Do they know it’s Christmas’(1984), 캐나다 출신 노던 라이츠(Northern Lights)의 ‘Tears are not enough’(1985)도 있지만, 아무래도 상징성의 차이가 크다. 


국내에선 단연 1999년 ‘하나되어’가 대표적이다. IMF로 인한 실업자 구호 기금 마련을 위해 이선희, 이승철, 엄정화, 김종서, 김경호, 핑클, 박지윤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모였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었다. 여기에 드라마틱한 선율과 희망찬 노랫말, 김경호, 신효범, 김종서 등의 절창이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선사했다. 지난 5월, 코로나19 극복 기금 마련을 위해 백지영, 인순이, 레드벨벳, 김태우, 10cm 등 30여 팀이 넘는 가수가 모여 작업한 곡도 ‘하나되어’를 재구성한 ‘우리 하나되어 2021’이었다.


1. 현인 ‘굳세어라 금순아’(1953)

2. 남인수 ‘사백환 인생비극’(1960)

3. 양희은 ‘아침이슬’(1971)

4. 한대수 ‘물 좀 주소’(1974)

5. 노래를 찾는 사람들 ‘사계’(1989)

6. 정태춘 ‘아, 대한민국’(1990) 

7. 정태춘 ‘92년 장마, 종로에서’(1993)

8. 서태지와 아이들 ‘교실이데아’(1994)

9. 서태지와 아이들 ‘시대유감’(1996)

10. DJ DOC ‘성수대교’(1995)

11. H.O.T. ‘아이야!’(1999)

12. Now N New ‘하나되어’(1999)

13. 유희열 ‘엄마의 바다’(2014)

14. 루시드 폴 ‘아직 있다’(2015)

15. 김윤아 ‘키리에’(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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