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컨택트>를 보고.

사고(思考)는 언어에 기인한다.

by 정민재

* 이 글은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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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는 지구를 방문한 신원미상의 비행체와 우주 생물에 대한 이야기를 독특한 관점으로 풀어냅니다. 물론 정확히는 테드 창의 원작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가 접근하는 방식이겠으나, 영화만의 장치와 상상력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기존 ‘외계인의 지구 상륙’류 영화가 디스토피아로 변한 일상에서 비롯되는 사건을 주로 그렸다면, <컨택트>는 아예 다른 측면에서 내러티브를 전개합니다.


어느 날 세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비행체와 마주하게 됩니다. 미국과 영국, 중국 등 열두 곳에 상륙한 비행체는 공격은커녕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지만, 그 압도적 존재감만으로 세계를 일대 혼란에 빠트립니다. 저명한 언어학자 루이스(에이미 아담스 분)는 물리학자 이안(제러미 레너 분)과 함께 외계 생명체 ‘헵타포드’(영화 속에서 인간이 임의로 붙인 이름입니다.)와의 접촉을 통해 그들이 지구에 온 목적을 알아내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영화는 이들이 서로 다른 언어를 극복, 소통하는 과정과 이로써 나타나는 루이스의 사고 체계 변화에 초점을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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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호흡은 그다지 긴박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감독은 느긋하고 여유롭게, 그러나 구석구석을 촘촘하게 파고들며 밀도 높은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고도로 진화한 표의 문자라고 해도 무방할 헵타포드의 언어 구조를 습득하는 과정, 그 속에서 인간의 이기와 조급함으로 벌어지는 갈등, 새로운 언어를 받아들인 루이스가 겪는 혼란이 짜임새 있게 들어차 있습니다. 특히 오프닝 시퀀스와 영화 중간중간 등장하는 딸에 대한 기억이 플래시백이 아닌 플래시 포워드였음을 알게 되는 순간, 그 짜릿한 전율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후 자신의 능력을 깨달은 루이스가 갈등의 해결을 위해 백방으로 뛰는 종반은 전과 달리 급박하게 흘러갑니다.


영화의 실마리가 되는 이론은 ‘사피어-워프의 가설’입니다. 영화에도 직접 언급되는 이 이론은 인간이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방법이 사용하는 언어의 체계와 관련이 있다는 언어학적 가설이지요. 과거와 현재, 미래가 확실히 구분되는 선형적 시간관을 가진 인간이 통합된 원형적 시간관의 고등 언어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영화의 중심 줄기입니다. 이러한 배경 설명이 충분히 이루어질 때까지는 느릿한 호흡으로, 이후에는 피치를 올려 몰입력을 끌어올리는 탁월한 완급조절은 이 영화의 강점입니다. 시각에 따라 이 지점의 연출이 매우 타이트하고 정교하게 다가올 수도, 스펙터클한 영상미를 기대한 관객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5.jpg 영화 <컨택트>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by 요한 요한손(Jóhann Jóhannsson)


<컨택트>의 또 다른 매력은 압도적인 음향, 음악입니다. 음악을 맡은 요한 요한손(Jóhann Jóhannsson)과 드니 빌뇌브 감독의 케미스트리는 이미 <프리즈너스>(2013), <시카리오>(2015)를 통해 증명된 바 있지만, 본작에서 소리가 거둔 성취는 이를 뛰어넘습니다. 아이슬란드의 일렉트로닉 밴드 아파라트 오르간 콰르테(Apparat Organ Quartet)의 리더기도 한 그는 신원미상의 비행체와 외계 생물체의 신비롭고 공포스러운 속성을 소리로 극대화했습니다. 드론과 엠비언스를 바탕으로 신시사이저와 퍼커션, 스트링과 합창 등을 조화시킨 차가운 일렉트로니카가 화면의 흡인력을 견인합니다. 영상 자체의 긴장보다 거대한 소리 다발로 형성한 긴박감이 대단하다고 할까요. 요한 요한손이 맡은 사운드트랙 앨범을 반드시 다시 들어볼 것을 권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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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밀한 탐구와 무한한 상상력의 결과물입니다. 좋은 원작을 두고도 이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수도 많지만, <컨택트> 팀은 원작의 뛰어난 뼈대에 영화적 도구를 덧대 또 하나의 훌륭한 오리지널을 탄생시켰습니다. 배우들의 준수한 연기는 물론, 복잡한 서사 구조를 유려하게 풀어낸 연출의 승리입니다. 여기에는 영상에 걸맞은 소리를 선사한 창의적인 사운드 디자이너 요한 요한손의 공도 상당합니다. 흠잡을 곳이 별로 없는 영화임에도 <컨택트>란 한국어 제목(엄밀히 말해 한국어도 아니지만)이 다소 모호하다는 인상이 강한데, 영어 원제 <도착(Arrival)>이나, 원작 소설의 제목 <네 인생의 이야기(Story of your life)>를 상기한다면, 영화가 갖는 의미가 조금 더 그럴듯하게 다가올 것 같습니다. ‘시간은 반드시 선형으로 흐르는가.’ 재미있는 질문을 던진 영화였습니다.


별 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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