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탄의 연기력과 빈틈없는 연출의 환상적 콤비 플레이!
존 매든 감독의 영화 <미스 슬로운(Miss Sloane)>은 미국 정치계를 관통하는 로비스트의 세계를 다룹니다. 그간 복잡하게 얽혀있는 미국의 정치 이면을 그린 영화는 많았지만, <미스 슬로운>은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극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색다릅니다. 여담이지만 영어 원문을 보기 전 한글 제목만 보고 느린 여성(‘Miss Slown’)에 관한 내용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작중 주인공 엘리자베스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 분)의 성을 딴 제목이더군요. 영화는 그 정도로 '미스 슬로운'의 비중이 지배적입니다.
영화 속 엘리자베스 슬로운은 ‘넘버원’ 로비스트입니다. 업무를 위해 규칙적인 식사와 로맨스 같은 사사로운 일상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퇴근 후 새벽에도 팀을 불러 모아 회의를 여는 ‘워커홀릭’이지요. 거침없는 추진력과 맥락을 읽는 뛰어난 통찰력은 그의 특기. 그는 스스로의 신념과 맞지 않는 클라이언트는 과감히 거절하는 ‘양심 로비스트’인 한편, 승리를 위해서라면 타인의 약점을 이용하거나 위법 행위를 저지르는데도 주저하지 않는 모순적인 면을 보입니다. ‘끝판왕’의 자가당착과 그에 따른 고뇌가 영화의 핵심입니다.
영화를 관통하는 소재 ‘히튼-해리스’는 미국의 수정헌법 제2조에 제동을 거는 가상의 법안입니다. 수정헌법 제2조는 개인의 총기(무기) 소유 권리를 인정하는 헌법으로, 미국 건국 초기부터 유지된 기본권 중 하나지요. 실제로도 첨예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는 이 법안을 두고, 유지와 개혁을 주장하는 양측의 물밑 작전이 극의 배경입니다. 수정헌법 제2조, 제5조 등 다소 생소한 용어들이 연이어 등장하고, 영화 초반 대사의 양이 상당해 따라가기 숨 가쁘지만 몰입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이야기의 완급과 밀도를 영리하게 조절한 것이 영화의 힘입니다. 쉼 없이 촘촘하고 빠르게 달리다가도 결정적 순간에서 호흡을 풀며 템포를 조절하고, 힘을 줘야 할 부분에서 다시 한번 확실히 몰아치는 진행이 압도적입니다.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에도 한 번의 지루함 없이 흡인력을 발휘하는데, 정교한 시나리오만큼이나 연출 또한 혁혁한 공을 가집니다. 화면 구성과 음악의 사용이 비교적 담백한 것을 감안하면, 오롯이 세밀한 속도 조절만으로 이뤄낸 성과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미스 슬로운> 제1의 강점은 제시카 차스테인의 명쾌한 연기입니다. 영화를 위해 실제 로비스트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는 그는 섬세한 표현으로 완벽주의 로비스트 엘리자베스 슬로운을 구현합니다. 어마어마한 대사량을 경쾌하게 소화해냄은 물론, 선명한 눈빛과 표정, 세심한 애티튜드로 인물을 충실히 그려냅니다. 캐릭터의 뚜렷한 색깔로 인해 자칫 과하게 느껴질 수 있는 위험부담도 적확한 묘사로 가뿐히 넘어섭니다.
완벽에 가까운 극적 짜임새의 영화에도 한계는 있습니다. 주인공 ‘미스 슬로운’이 상당히 입체적 설정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심도는 비교적 얕은 정도로만 드러납니다. 이렇다 할 단서 없이 사건만 연속되니 이 사람의 기저에 깔린 본질이 불분명해지는 것이지요. 결국 ‘미스 슬로운’은 원래 이런 사람이다,라고 1차원적으로 이해하는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극의 무게중심이 원톱 주연에 쏠려있어, 그가 속한 로비스트 세계에 관한 묘사는 겉핥기 수준에 머무르는 아쉬움도 적지 않습니다.
<미스 슬로운>은 제시카 차스테인이 선보인 경탄의 연기, 엔터테인의 기능을 극대화한 빈틈없는 연출로 카타르시스를 안깁니다.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다루면서, 기름기를 빼고 흥미의 요소를 강화한 것이 성공의 요인입니다. 비록 인물의 내면 묘사에는 다소 허술한 지점이 있으나, 치밀하게 짜 맞춘 서사 구조와 그에 걸맞은 영화 기법으로 약점을 너끈히 상쇄합니다. 스펙터클한 액션 하나 없이도 상영 시간 동안 짜릿한 쾌감을 제대로 선사하는 ‘팝콘 무비’라 하겠습니다.
별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