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비튼 언더커버, 스타일리시한 느와르, 위태로운 멜로.
변성현 감독의 <불한당 : 나쁜 놈들의 세상>은 대단히 직설적입니다. 절대 에두르지 않아요. 처음부터 인물 설정과 배경, 사건의 실마리를 있는 그대로 제공합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정보를 직접 전하지요. 이 솜씨 좋은 스토리텔러는 친절하게 서사를 이어가면서도 결정적 정보는 뒤로 돌려 끝내 톡 쏘는 재미를 만듭니다. 덕분에 지독히 꼬여있는 이야기 타래에 비하면 뒷맛이 개운한 편입니다.
만듦새 자체도 상당합니다. 핸드헬드와 스테디 캠을 적소에 활용한 유연한 촬영과 디테일에 신경 쓴 화면 구성이 인상적이에요. 사소한 부분까지 공들인 미장센, 난투극 시퀀스에서 빛을 발한 만화적 연출은 높은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잔인함의 정도를 두고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일부 장면을 제외하고는 꽤 담백하게 볼 수 있는 수준입니다. 같은 장르의 다른 영화들과 비교해도 적당한 수위였어요. 의외로 백미는 오프닝 시퀀스인데, 근래의 영화를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로 짜릿합니다.
조폭, 느와르, 언더커버. 세 가지 키워드만으로 진부함을 우려했다면 섣부른 판단입니다. 뛰어난 연기력을 기초로 한 캐릭터, 유려하게 완급을 조절하며 리듬감을 부여한 이야기가 소재의 식상함을 상쇄합니다. 몇 겹을 포갠 메인 플롯의 구성미가 탁월해요. 꽤나 복잡한 구조임에도 시점을 이동하며 자연스럽게 내러티브를 풀어간 것이 강점! 여기에 이야기 사이사이 묘하게 흐르는 섹슈얼한 긴장감이 색다른 감칠맛을 더합니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개성을 획득하죠.
훌륭한 연기가 매끄러운 이야기에 드라이브를 겁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설경구의 내공도 만만치 않지만, 역시 임시완의 재발견에 무게감이 실려요. 다층 이야기 구조를 관통하는 핵심 인물로서 서로 상반된 역할을 동시에 소화하는 조현수(임시완 분)를 자신만의 색깔로 근사하게 표현했습니다. 도무지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는 까다로운 감정 선을 섬세하게 풀어냈을 뿐 아니라, 좀처럼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액션에서도 놀랄만한 완성도를 보였습니다. 본 작품이 그에게 단순 이미지 변신의 차원이 아닌, 배우로서 운신의 폭을 넓히는 발판이 될 듯해요.
치밀하게 짠 중심 줄기와 달리, 짧은 호흡으로 단서를 제공하는 서브플롯은 약간의 아쉬움을 남깁니다. 두 주인공을 제외한 개별 인물의 설정과 그들의 이야기에 공백이 느껴지는 탓입니다. 고병갑(김희원 분), 천인숙(전혜진 분) 등 깊이의 여지가 있는 인물들이 평면적으로 그려지며 해소되지 않는 궁금증이 생기는 것이지요.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으나, 충분히 입체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인물도 매끈한 진행을 위해 단순화 시킨 것 같아 못내 서운합니다.
특히 극중 천인숙 팀장의 낮은 활용도가 아깝습니다. 해당 장르에서 모처럼 여성이 중요 열쇠를 쥐었음에도 그저 일차원적, 소모적으로 그려지는데 그쳐요. 초반까지만 해도 분명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인물처럼 보였는데, 시간이 지나며 그 역할이 점점 줄어들더니 후반에 이르러서는 존재감이 평범한 조연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물론 천인숙 역을 맡은 전혜진의 매력을 느끼기엔 충분하지만, 더 큰 활약을 기대했다면 분명 씁쓸함을 감추기 어렵습니다.
낡은 소재의 약점을 시나리오의 밀도로 극복한 좋은 사례입니다. 이미 유사한 장르, 서사가 많은 난국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지 영화는 분명하게 제시하지요. 이야기의 찰기를 더하는 연출, 배우들의 팽팽한 연기 합이 오락성을 높였습니다. 극중 주요 정보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면서 최종 해석의 자유는 관객에 맡기는 배려도 눈여겨볼 부분입니다. 살짝 비튼 언더커버, 스타일리시한 느와르, 위태로운 멜로. <불한당 : 나쁜 놈들의 세상>이 뻔한 영화 신세를 폼 나게 탈출한 방법입니다.
별 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