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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May 07. 2022

영어 과용의 시대

한글 새소식 제597호 기고


‘마마(MAMA: Mnet Asian Music Awards)’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 음악에 관심 있는 이라면 매년 연말 케이블 채널 ‘엠넷’에서 주최하는 이 시상식을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1999년 ‘엠넷 영상 음악 대상’이라는 이름으로 첫 회를 개최한 시상식은 2009년부터 현재의 이름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2010년부터는 아예 마카오, 홍콩, 일본 등에서 시상식을 열어가며 국제적인 위상을 쌓아 왔다. ‘케이팝을 대표하는 글로벌 음악 시상식’이라는 주최 측의 소개가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마마가 정말 ‘아시아 음악 시상식’인가.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이 다루고 있는 음악 중 대부분은 한국의 대중음악이다. 대상을 포함한 주요 부문의 후보와 수상자 중 한국 가수, 한국 작품이 아닌 경우는 거의 없다. 한 해 동안 뛰어난 활약을 펼친 한국 외 아시아의 가수들은 ‘아시아 음악 부문’으로 분리된 몇 개의 부문에만 후보로 올라 상을 가져간다. 그럴듯한 허울과 달리, 마마는 진행자부터 시상자, 수상자와 공연자의 절대다수가 한국인인 ‘한국 음악 시상식’이다.



그런데 작년 12월에 열린 마마를 방송으로 보면서 의구심이 들었다. 이게 정말 한국의 음악 시상식인가. 시상식장 내 안내 방송은 물론, 텔레비전 방송에 나가는 시상자 소개, 후보 소개 등은 모두 영어로만 이루어졌다. 한국어와 영어를 혼용하지도, 한글 자막을 넣지도 않았다. ‘베스트 밴드 퍼포먼스’ 부문 후보 중 하나인 잔나비의 ‘가을밤에 든 생각’을 영상으로 소개하면서, ‘Best Band Performance’, ‘Jannabi’, ‘A thought on an autumn night’라는 영어만이 화면에 뜨는 식이었다. 이 노래는 원제가 한국어다. 대다수의 한국 대중은 화면에 나타난 영어 제목을 그날 처음 봤을지도 모른다. 거의 모든 상의 이름을 영어로 쓰느라 ‘KTO Breakout Artist’처럼 의미를 즉시 파악하기 힘든 상이 나오기도 했다. 촌극이었다.


음악에 몸담은 탓에 마마에 먼저 비판의 날을 세웠지만, 영어 일변도의 풍경은 우리 일상에도 만연하다. 언젠가 젊은이들이 몰리는 카페에 갈 기회가 있다면 한 번쯤 메뉴판을 유심히 살펴보길 바란다. 안 그런 곳이 더 많겠지만(그렇게 믿고 싶다), 놀랍게도 몇몇 카페는 메뉴판의 모든 품목을 영어로만 적어두기도 한다. 그렇게 하면 더 멋있어 보이나? 아님 영어에 밝은 젊은 세대가 주로 찾아서? 그렇다면 세대를 막론하고 찾는 백화점, 상가 등의 화장실 표지판을 한 번 관찰해보라. 대다수의 경우 ‘Toilet’, 혹은 ‘Restroom’이라고 적혀있을 테다. 심지어 화장실 안의 물비누, 화장지는 ‘Hand wash’, ‘Paper Towel’ 등으로만 적혀있는 경우도 많다.


가끔은 내가 모르는 사이 영어가 한국의 공용어라도 된 건가 싶다. 하다못해 샴푸, 화장품 같은 생활용품을 사려고 해도 겉포장은 영어투성이다. 지금 인터넷 쇼핑몰에 접속해 샴푸를 한 번 검색해보자. 화면을 채우는 갖가지 샴푸 중 한글이 영어보다 크고 분명하게 적혀 있는 상품은 많지 않을 것이다. 외제 아닌 국산품도 그렇다. 영어가 능통한 이들에겐 이러한 상황이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동안 크게 의식하지 않고도 잘 살아왔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이웃 중엔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많다. 영어에 취약한 노인이나 어린아이는 어떤가. 이들은 모국어가 아닌 국제 공용어에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졸지에 크고 작은 정보에서 밀려나고 있다.



문제는 로마자 그대로 쓰인 영어뿐만이 아니다. 여기저기서 한글로 무분별하게 쓰고 있는 영어 표현은 이보다 훨씬 많다. 음원 사이트에 들어가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앨범 몇 장의 소개 글을 살펴봤다. ‘시크한 보컬’, ‘리드미컬하고 다이내믹한 진행’, ‘당당한 애티튜드’, ‘에너제틱한 탑 라인’… 우리말로도 얼마든 쓸 수 있는 표현이 대다수다. ‘당당한 자세’라고 쓰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생활 용어를 굳이 영어로 바꿔 쓰는 경우도 늘고 있다. 한 신축 아파트 단지에서는 경로당을 ‘시니어 클럽’이라고 표기해 논란이 일었다. ‘시니어 클럽’이 잘못된 표현임은 차치하더라도 (‘시니어 센터’가 맞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다.


일상 속 과도한 영어 사용이 우리만의 문제는 아닌 모양이다. 최근 프랑스 한림원 중 하나인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프랑스 내 영어식 표현의 증가가 사회적 결속력을 떨어트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프랑스식 단어와 표현을 두고도 영어를 사용하는 행태가 계속 되면 자국어의 어휘가 점차 빈곤해지고 공공 영역에서 차별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선 교육 현장에서는 이미 몇 년 전부터 학생들의 어휘력이 과거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는 보고가 나왔다. 문해력 저하도 덩달아 심각한 상황이다. 생활 곳곳에서 영어를 이해하지 못해 불편을 겪었다는 노령 인구의 경험담은 이제 너무 많아 특별하지도 않은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는 영어 과용의 시대를 살고 있다. 아예 영어를 쓰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영어 표현을 써야만 할 때도 분명히 있다. 인터넷, 텔레비전처럼 외국에서 들어온 단어는 일찍이 외래어란 이름으로 수용하지 않았나. 다만 우리말로 쓸 수 있는 표현은 가급적 우리말로 쓰자는 얘기다. 행여 ‘옷방’이란 우리말을 버젓이 두고 굳이 ‘드레스룸’이라고 쓴다고 해서 집의 품격이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한국의 음악 시상식을 영어로만 진행한다고 해서 곧장 아시아 음악 시상식이 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맞지 않는 영어를 기어이 쓰느니, 우리에게 익숙한 우리말을 올바로 사용하는 것이 훨씬 근사하다는 걸 기억했으면 한다.




지난 2월에 국방일보에 '올바른 국어 말하기의 중요성'을 쓰고 한글학회와 연이 닿았어요. 한글학회는 1908년 주시경 선생이 창립한 '국어연구학회'에서 1949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뀐 이래, 100년 넘게 우리말과 글의 연구, 통일,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단체입니다. <한글 새소식>은 1972년 창간 이후 이번 달 제597호를 맞았어요. 오랜 역사를 가진 곳에 뜻깊은 글을 쓸 수 있어 기뻤습니다. 우리말을 더 아끼고 올바르게 사용하겠다고 다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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