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감독이 써 내려간 ‘조선의 개새끼’ 열전(烈傳)
이준익 감독의 [박열]은 실존 인물과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영화의 모티프가 된 박열 의사는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나 3.1 운동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아나키즘에 근간을 둔 독립운동을 지향한 인물입니다. 일본의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는 척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뜻이 맞는 일본인과는 기꺼이 연대할 수 있는 유연함이 그의 특징이었지요. ‘불령사’ 같은 비밀 결사를 조직할 때에 조선인은 물론, 가네코 후미코 등 일본인과도 함께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박열(이제훈 분)은 일제 강점기에 도쿄에서 살고 있는 조선 청년입니다. 그는 조국을 빼앗은 원수의 심장부에 살지만 결코 위축되어 있지 않습니다. 비록 생계를 위해 인력거를 끌어도 일본인의 부당한 대우에는 불같이 화를 내고, 뜻이 맞는 ‘불령한’ 조선인과 가네코 후미코(최희서 분) 등 일부 일본인들을 모아 ‘불령사’를 조직해 일제의 전복을 꿈꾸지요. 그러던 중 관동 지방을 강타한 대지진 이후 일제는 체제 유지를 위해 조직적으로 조선인을 학살하고, 그 만행을 감추기 위해 불령사의 박열을 대역사건의 배후로 지목, 법정에 세우려 합니다. 영화는 그를 쓰러트림으로써 국가의 안정을 꾀하려는 일제와 이를 역이용, 제국주의 정권에 카운터펀치를 날리려는 박열의 팽팽한 대립이 중심입니다.
영화의 특장점은 짜임새 있는 내러티브입니다. 촘촘한 고증을 통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행적을 좇는 동시에 서사적 재미도 단단히 챙겼어요.ᅠ이준익 감독은 사실의 재현과 극적 연출 사이에서 노련하게 균형을 잡습니다. 특유의 담백한 진행과 적정의 감동 코드, 불쑥 급소를 찌르는 유머 감각도 여전히 생생합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취조 장면을 중심으로 밀도 있게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관동대지진과 일제의 학살 등 자칫 활극으로 치우칠 수 있는 장면들을 최소한으로 담아낸 것도 훌륭한 선택입니다. 덕분에 무게감 있는 이야기가 편안하게 들어오니까요.
관객이 부담스럽지 않도록 능숙하게 치고 빠지는 감정 선이 지극히 이준익 감독답습니다. 그의 영화가 늘 그랬듯, 작위적 감정 과잉의 상태를 유유히 피하며 임팩트만 확실히 주는 식이지요. 배우들의 세밀한 감정 연기를 포착하는 클로즈업 중심 진행과 시공간의 특성을 잘 살려낸 감각적 영상도 볼거리입니다. 종결 부분에서 역사적 사실을 모두 밝히긴 하지만, 극 자체의 결말은 열어두어 이후의 삶을 상상토록 한 것 역시 그 다운 배려입니다. (참고로 크레디트를 마지막까지 보면 이후 박열 의사의 삶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제작진의 감사 인사가 나옵니다. 몇 줄 텍스트에 불과하지만 모르고 놓친다면 아쉬울 거예요.)
실화 기반의 영화답게 인물 설정도 탄탄합니다. 용기와 ‘똘끼’로 권력에 항거하는 박열과 기득권을 향한 뿌리 깊은 증오로 굳은 저항성을 드러내는 가네코 후미코. 좀 더 풍부한 이야기를 지닌 쪽은 의외로 가네코 후미코입니다. 흡인력 측면에서 박열을 웃돌아요. 일본인임에도 조국의 비인간적 식민 통치를 부끄러워하고, 조선인을 동정하는 것이 아닌 진정한 ‘동지’로 여기는 모습이 섬세하게 그려집니다. 그 시대에 어떻게 이런 인물이 나타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빠트리지 않습니다. 가네코 후미코의 존재감이 상당할 수밖에 없죠. 반면 박열은 강한 신념과 거역의 태도, 활력을 더하는 위트까지 갖췄음에도, 그의 배경은 간접적으로 몇 차례 제시되는데 그쳐 다소 헛헛함을 남깁니다. 그러나 통통 튀는 캐릭터를 제대로 풀어내는 이제훈, 최희서의 하모니제이션은 최고 수준입니다.
[라디오 스타], [님은 먼 곳에], [소원], [사도] 등 이준익 감독과 여러 차례 함께한 음악 감독 방준석은 이번에도 큰 힘을 발휘합니다. 영상의 호흡과 잘 어울리는, 적소에서 감정의 울림을 만드는 수려한 음악이 필름 곳곳에 묻어있어요. 방준석은 직접 기타를 잡은 것을 비롯, 드럼에 신석철, 베이스에 서영도와 김석민, 색소폰과 클라리넷에 손성제 등 최상급 연주자와 함께 함으로써 작품의 두께를 공고히 쌓았습니다. 영화 속 가네코 후미코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이태리정원’(20세기 초반의 전설적인 무용수 최승희 취입)을 주제가로 사용, 오프닝과 엔딩에 배치한 것 또한 방준석, 이준익 콤비의 센스라고 하겠습니다.
매력적 소재의 탁월한 영화화 사례입니다. 그간 비교적 조명을 받지 못했던 박열 의사를 스크린으로 옮겨 신선도를 획득했고, 정교한 완성도로 영화적 재미를 충족했습니다. 철저한 연구를 통한 사실 고증, 매끄럽게 흐르는 스토리텔링이 러닝타임 내내 빛을 발합니다. 자신만의 해석으로 캐릭터에 숨결을 불어넣은 배우들의 연기도 근사합니다. 시대극에 통달한 명감독이 써 내려간 ‘조선의 개새끼’ 열전(烈傳)!
별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