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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Jun 29. 2018

[Cigarettes After Sex]

환상처럼 피어나는 드림 팝

상념을 잠재우는 아름다운 소리 풍경

환상처럼 피어나는 드림 팝, [Cigarettes After Sex]



‘섹스 후의 담배’.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기상천외한 밴드 이름이야 수없이 많았지만, 이처럼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며 자신들의 음악과도 맞닿아 있는 케이스는 아무래도 특별하다. 나른함과 몽롱함 사이의 묘한 긴장감, 쉼 없이 감지되는 관능적 공기. 퍽 대담한 작명의 밴드 시가렛 애프터 섹스(Cigarettes After Sex)는 그 이름 못지않게 예사롭지 않은 음악을 구사한다. 덕분에 최근 부지런한 음악 팬들의 재생 목록엔 이 팀이 빠지지 않는다.


2008년에 결성된 이력에 비해 발표된 작업물은 다소 적다. 정규 1집에 해당하는 본 셀프타이틀 앨범 [Cigarettes After Sex]를 제외하면, 10년에 가까운 지난 시간의 디스코그래피는 2012년에 발매한 EP [I.]가 유일하다. 그럼에도 유튜브에선 앨범에 수록될 신곡이 공개될 때마다 수백만의 조회 수를 기록했고, 제법 그럴듯한 규모의 월드투어도 순항 중이다. 이렇다 할 대중 히트 곡 하나 없는 인디 밴드의 존재감으론 결코 가볍지 않은 수준이다. 


평단의 관심도 남다르다. 미국의 <Rolling Stone>은 2016년 1월, 이들을 ‘당신이 알아야 할 10명의 가수’ 중 한 팀으로 꼽으며 “연기로 가득 찬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멜랑콜리하고, 양성(兩性)적인 팝 누아르 밴드”라고 소개했고, 같은 해 4월, 캐나다의 <Vice>는 “소박하고 탁하지만 로맨틱하며, 보컬 곤잘레즈의 양성적 목소리에는 비정한 날카로움이 있다”고 평가했다. 주목할 것은 당시 이들은 EP 한 장과 몇 곡의 싱글을 낸 것이 전부였다는 점이다.


이 모든 성과의 주역은 프런트 맨 그렉 곤잘레즈(Greg Gonzalez)다. 미국 텍사스에서 밴드를 조직하고, 브루클린으로 터를 옮겨 재정비했으며, 앨범 두 장의 거의 모든 곡을 홀로 만들고 프로듀싱 했다. 앰비언스를 섬세하게 활용해 사운드 개성을 쌓고, 언뜻 들어서는 성별을 가늠하기 힘든 독특한 보이스 컬러로 화룡점정을 이룬 것도 그의 공이다. 5년 전 첫 EP [I.]가 비범한 신인의 등장 예고였다면, 첫 번째 풀 렝스 앨범 [Cigarettes After Sex]는 노련하게 펼친 재능의 결과물이다.


그렉 곤잘레즈


시가렛 애프터 섹스만의 드림 팝

5년 전 EP [I.]에 이어, [Cigarettes After Sex] 역시 몽환적 드림 팝이 앨범의 근간을 이룬다. 브라이언 이노(Brian Eno)와 에이펙스 트윈(Aphex Twin)을 자양분 삼은 앰비언트,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과 슬로우다이브(Slowdive)를 연상시키는 슈게이징이 음반의 핵심이다. 공간감을 키우고 여백을 밀어내는 희뿌연 소리 풍경. 실제로 그렉 곤잘레즈는 <Vice>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음악은 에이펙스 트윈의 [Ambient Works Ⅱ] 등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며 “우주에 떠 있는 것 같은, 마치 풍경에 속해있는 것 같은 감각을 구현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들이 그저 과거의 작법에 매몰된 복고주의자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가렛 애프터 섹스가 차별화되는 지점은 선명하고 유려한 멜로디에 있다. 밴드는 이펙터를 걸어 웅웅대는 일렉트릭 기타와 빽빽한 드론 사운드가 쉬지 않고 몽환경을 그리는 와중에도 코러스의 임팩트 만큼은 반드시 사수한다. 잘 들리는 선율로 듣는 이를 매혹하니 지루할 틈이 없다. 여기에 특이하게 흘리는 발음으로 무심한 듯 툭툭 내뱉는 곤잘레즈의 보컬이 듣는 재미를 더한다. 시규어 로스(Sigur Ros)가 특유의 주법과 욘시(Jonsi)의 목소리로 기억되듯, 시가렛 애프터 섹스는 흐릿한 소리 다발에서 꿈틀대는 멜로디와 곤잘레즈의 목소리로 자신들을 각인한다.


밴드 이름을 그대로 내건 첫 번째 스튜디오 앨범 [Cigarettes After Sex]는 서로 다른 주제와 소재, 표현 방식으로 써 내려간 사랑 노래의 모음이다. ‘그렉 곤잘레즈의 사랑론’으로도 정리할 수 있다. 옛 연인을 그리워하는 마음, 모든 인연이 어렵기만 했던 과거의 회상, 연인을 위해서라면 희생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의지 등이 평온한 비트 위에 차례로 등장한다. 줄곧 차분하고 고요하며 성찰적이다. 때로는 염세적이고 냉소적이기도 하다. 이야기꾼 곤잘레즈는 시에 가까운 화법과 우수 어린 목소리로 복잡한 감정을 하나씩 풀어나간다.



[Cigarettes After Sex]

지난해 12월에 선 공개 된 첫 트랙 ‘K.’는 음반의 대표곡으로 부족함이 없다. 어른거리는 일렉트릭 기타와 빈틈을 채우는 드론, 멜로디를 이끌어가는 어쿠스틱 기타의 평행 전개가 곡의 중심을 잡고, 속삭이듯 나긋한 곤잘레즈의 목소리는 매끄러운 선율을 읊어낸다. 제목 ‘K’의 주인공은 조건 없는 섹스 파트너로 만나 연인으로 발전했던 여인 크리스틴(Kristen). 노래 속 남자는 그녀와의 첫 만남부터 이별까지를 떠올리며 달콤, 씁쓸한 심정을 꾸밈없이 털어놓고는, 이내 돌아오라고 담담히 부탁한다. 노래에서 느껴지는 감수성과 생생히 살아있는 후렴의 마력은 이어질 수록곡들의 스타일을 암시한다.


‘Each Time You Fall in Love’와 ‘Sunsetz’는 서로 다른 지점에서 듣는 이를 끌어당긴다. 지난 관계들에 온전히 만족할 수 없었던 날들을 떠올리며 만들었다는 ‘Each Time You Fall in Love’엔 부서질 듯한 음울감이, ‘그대’와 함께 찬란히 빛났던 날들을 회상하는 ‘Sunsetz’엔 처연한 낭만이 넘실댄다. 소원해진 연인과의 사이를 대재앙 상황에 빗댄 ‘Apocalypse’는 또 어떤가. 누구나 수긍할법한 표현이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쓸 수 있는 스토리는 아니다. 고유의 정서를 자신만의 말로 담아내면서도 귀에 명료하게 들어오는 훅을 챙기는 감각은 여기서도 돋보인다.


팀의 시그니처 사운드와 팝적 접근이 가장 조화롭게 호응한 곡은 단연 ‘Sweet’과 ‘Truly’다. 곡 제목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은근하게 섹스어필을 노래하며 “그대를 위해선 상처라도 기꺼이 받겠다”고 말하는 ‘Sweet’, “사실 나랑 자기 위해 날 사랑할 필요까진 없다는 걸 알아”라며 자조 섞인 쓴웃음을 짓는 ‘Truly’는 앨범 내에서 가장 인상적인 후렴을 들려준다. 압운을 맞추며 언어의 리듬감을 고려한 센스 역시 특기할 점. 밴드는 많은 대중과 접촉면을 마련하기 어려운 장르의 한계를 누구에게나 쉽게 들리는 멜로디로 극복한다.


마지막 곡 ‘Young & Dumb’은 그렉 곤잘레즈 보컬의 독특한 맛을 만끽하기에 적합하다.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1960년대 프렌치 팝의 아이콘 프랑수아즈 아르디(Françoise Hardy)를 꼽았던 그는 이 곡에서 마치 프렌치 포크를 부르듯 나직하게 노래한다. 이때 된 발음은 뭉개고 여린 발음은 더욱 굴려 한층 곱고 연하게 다루는 언어가 포인트다. 어느 누가 ‘The patron saint of sucking cock’, ‘hot as fuck’과 같은 말을 이보다 감미롭게 말할 수 있을까. ‘Señorita’와 ‘you’re a cheater’를 부르는 구절에선 그 의도가 좀 더 확실해진다. 팀을 이끄는 그렉 곤잘레즈가 과연 영리한 송 라이터, 프로듀서인 동시에 색깔 있는 보컬리스트임이 이 곡에서 명확해진다.



어수선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준비된 신인

야릇한 밴드 명만큼이나 흥미로운 앨범이다. 한두 번 스치듯 들어서는 그 매력을 오롯이 느끼기 쉽지 않다. 혹자는 이들의 음악을 두고 ‘잠이 온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보통 가수에게 이런 평가는 혹독하게 들릴지 모르나, 그렉 곤잘레즈는 그 말이 좋다고, 오히려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뮤직 테라피’ 같은 거죠. 그건 아마 내가 들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칭찬일 거예요. 왜냐면 저도 지치고 힘들 때면 머릿속의 잡념들을 지워내기 위해 음악을 들을 거거든요. 그런 말을 듣고 싶어요.”


시가렛 애프터 섹스는 슬로우다이브 부터 시규어 로스 등을 두루 아우른다. 앞 세대의 밴드들과 사운드 스케이핑 등 일부 접점을 공유하면서도 확고한 개성을 갖춘 것이 이들의 강점이다. 이미 음악 마니아들 사이에선 대중 감각을 견지한 악곡, 프런트 맨 그렉 곤잘레즈의 유니크한 스토리텔링과 가창에 매료되었다는 이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보편적 공감대를 획득한 저자극, 고밀도의 음악. 대단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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