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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Jul 10. 2018

[Palo Santo]

이어스 앤 이어스가 창조한 섹슈얼 팝 유토피아

Years & Years [Palo Santo] 

이어스 앤 이어스가 창조한 섹슈얼 팝 유토피아 



‘힙’해야 통하는 시대다. 오늘날의 키워드로 떠오른 힙을 정의하자면 이렇다. 지명도가 높지 않을 것, 남들과는 다를 것, 적당히 폼날 것. 그런 면에서 영국의 일렉트로 팝 밴드 이어스 앤 이어스(Years & Years)는 대단히 ‘힙‘하다. 적당한 수준의 인지도, 뚜렷한 개성을 가진 동시에 음악적으로는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각국의 ‘힙스터’들에게 포착된 이들은 국내에서도 ‘년앤년’이란 애칭을 얻으며 마니아를 결집했다. 결성부터 인기 대열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5인조에서 3인조로 재정비하며 음악의 방향을 선회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 팀을 꾸린 지 3년 만인 2013년, 올리 알렉산더(Olly Alexander)와 마이키 골즈워시(Mikey Goldsworthy), 엠리 터크만(Emre Türkmen)은 팝 록에 가까웠던 스타일을 일렉트로닉을 중심으로 한 팝으로 재설정한다. 이 시기에 발매한 ‘Real’, ‘Take Shelter’, ‘Desire’와 같은 곡들이 그 결과였다. 


팀의 변화에 발 빠르게 반응한 건 평단이었다. 영국의 BBC가 매년 음악 전문가들의 설문을 통해 가장 뛰어난 신인을 선정하고 발표하는 ‘Sound of...’에서 이어스 앤 이어스를 2015년 리스트의 첫머리에 꼽은 것이다. 주목해야 할 신인 밴드의 탄생 선언이었다. 뒤이어 ‘King’과 첫 번째 정규 앨범 [Communion](2015)이 모두 UK 차트 정상에 오르며 이들의 시대는 본격 개막했다. [Communion]은 그해 영국에서 데뷔한 밴드의 앨범 중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이 되었고, 이후 세계 각지에서 크고 작은 공연을 개최하며 인지도를 쌓았다. 한국에서의 첫 공연도 이 대목에서 2017년에 이루어졌다.  


이들의 흥행은 밴드의 캐릭터와도 관련이 있다. 팀의 보컬리스트이자 창작을 주도하는 프론트 맨 올리 알렉산더는 일찍이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밝혔는데, 음악에도 그의 시각을 반영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게이 팝스타들이 노래에서 ‘He’, ‘Him‘과 같은 남성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서글프다“는 이유였다. 무대에선 댄서들과 도발적인 퍼포먼스를 펼쳤다. 성 정체성을 팀의 브랜딩에 적극적으로 동원한 것이다. 겉보기와 달리, 당당한 ‘퀴어 프렌들리’ 행보의 이면엔 올리 알렉산더의 우려가 있었다. 그는 “학창 시절 또래로부터 받았던 따돌림과 괴롭힘이 떠올라 무대에 오를 때마다 두려웠다“고 회상했다. 대중이 자신의 모습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물론 이는 그의 기우에 불과했고, 밴드는 무사히 인기 궤도에 올랐다. 


올리 알렉산더에게 이 경험은 차기작을 위한 실마리가 됐다. 그는 1집을 발매하고 예상보다 긍정적인 사람들의 반응에 자신감이 생겼고, 무엇보다 그와 같은 동성애 청소년들이 무대를 즐기며 서로 친구가 되는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온전히 담아도 되겠다는 안도감도 들었을 테다. 이후 그는 새 앨범을 작업하며 다음 두 가지에 특히 신경을 썼다고 전해진다. 그가 과거에 가장 좋아했던 브리트니 스피어스(Britney Spears), 크리스티나 아길레라(Christina Aguilera)로부터 수혈받은 거부할 수 없는(‘irresistible’) 멜로디 감각과 그의 우상인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와 프린스(Prince), 레이디 가가(Lady Gaga)에게 영향을 받은 공상 과학적 상상력이다. 이어스 앤 이어스가 창조한 환상의 세계이자 하반기 음악계 최고 기대작 중 하나인 [Palo Santo]는 그렇게 탄생했다. 



Inside of [Palo Santo] 

앨범의 제목인 ‘Palo Santo’는 스페인어로 ‘신성한 나무’를 의미한다. 이는 고대 잉카인으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팔로 산토’라는 작은 나무 막대기를 태우면 그 공간에 있는 악(惡)과 부정적인 기운이 정화된다고 한다. 올리 알렉산더는 “무언가를 태움으로써 부정적인 것을 정화할 수 있다는 개념이 마음에 들었다.”고 말하며 그에게는 음악을 만드는 것이 그러한 정화 작용과 비슷하다고 밝혔다. ‘팔로 산토’는 앨범에서 그가 만든 특별한 세계이기도 하다. 인간이 거의 사라지고 안드로이드가 주요 구성원이라는 설정의 이 공간은 개인에게 최고 수준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특정한 성(性)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진다. 인류가 사라진 ‘디스토피아’이면서도,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에겐 ‘유토피아’인 공간인 것이다. 


아무리 흥미로운 세계관, 이야기라도 음악이 빈약하다면 무용지물일 터. 영리한 이어스 앤 이어스는 세계관보다 짜임새 있는 음악으로 승부수를 띄운다. 전작 [Communion]의 주요 프로듀서였던 마크 랄프(Mark Ralph), 푸 파이터스(Foo Fighters)와 시아(Sia), 켈리 클락슨(Kelly Clarkson) 등과의 작업으로 최근 음악 팬들의 무한 신뢰를 받는 프로듀서 그렉 커스틴(Greg Kurstin)을 위시한 특급 제작진이 듣는 재미를 단단히 챙겼다. 세 멤버가 함께 곡을 썼던 1집과 달리, 올리 알렉산더를 중심으로 줄리아 마이클스(Julia Michaels), 저스틴 트랜터(Justin Tranter)부터 스티브 맥(Steve Mac), 제시 샷킨(Jesse Shatkin), 사라 허드슨(Sarah Hudson) 등 현재 팝 신을 주름잡고 있는 작곡가들을 대거 기용한 것도 특징이다. 



첫 곡 ‘Sanctify’부터 듣는 이를 강하게 끌어당긴다. 지난 3월에 리드 싱글로 공개된 노래는 가사로 먼저 화제를 모았다. 종교적인 언어를 동원해 얼핏 신성하고 정숙한 분위기를 연출한 듯 보이는 노랫말은, 사실 이성애(‘straight’) 남성과 사랑을 나눈다는 대담하고 섹슈얼한 내용이다. 은유를 통해 절묘하게 두 가지 상황을 그린 것이다. 범상치 않은 가사와 달리 음악은 친절하다. 리드미컬한 퍼커션과 잘 들리는 선율을 중심으로 대중적인 접근을 꾀했다. 전작에서 돋보였던 소리 장식을 대거 걷어내고 캐치한 팝송 만들기에 집중한 모양새다. 


 앨범의 기조 역시 이에 호응한다. 매 트랙 강력한 멜로디가 꿈틀댄다. 그렉 커스틴이 작곡과 프로듀싱에 참여한 ‘Hallelujah’와 ‘All For You’가 대표적이다. ‘Hallelujah’는 복잡한 리듬 패턴의 향연 중에도 단번에 귀에 꽂히는 후렴을 가졌고, ‘All For You’는 복고풍 신스를 매끈한 선율에 매치해 반복 감상을 유도한다. 두 번째 싱글로 공개한 ‘If You’re Over Me’는 어떤가. 에드 시런(Ed Sheeran)의 ‘Shape of You’ 등을 쓴 작곡가 스티브 맥이 참여한 노래는 귀에 맴도는 키보드 프레이즈를 중심으로 산뜻하고 발랄하게 진행된다. 정교한 프로그래밍으로 꽉 찬 사운드를 구현한 ‘Rendezvous’와 ‘Preacher’, 가사의 측면에서 첫 곡 ‘Sanctify’와 상통하는 ‘Palo Santo’ 또한 높은 흡인력을 갖췄다. 더없이 라디오 친화적인 구성이다. 



한편 앨범과 함께 공개된 ‘If You’re Over Me’의 리믹스 버전에선 반가운 이름이 눈길을 끈다. 올해 데뷔 10주년을 맞은 샤이니의 멤버 키가 게스트 보컬로 참여한 것이다. 청량한 원곡의 매력에 키의 담백한 음색이 더해져 색다른 어울림이 탄생했다. 노래에서 새롭게 추가된 한국어 가사를 듣는 것도 재미있다. 지금까지 한국 가수가 영어로 된 곡에 참여할 때 한국어 가사를 넣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매우 이례적인데, 의외로 자연스럽게 어울려 흥미롭다. 오는 7월 말 예정된 이어스 앤 이어스의 내한 공연에서 멋진 하모니를 펼친 둘의 만남을 기대해 본다.


 [Palo Santo]의 제작 전반을 주도한 올리 알렉산더는 탁월한 보컬리스트로서의 역량도 유감없이 발휘한다. 앨범의 주를 이루는 댄서블한 곡에서는 그루브를, 감상의 완급을 조절하는 ‘Hypnotised’, ‘Lucky Escape’에서는 섬세한 감성 터치를 부여하는 식이다. 그는 개성 강한 톤으로 팀의 색깔을 공고히 하면서, 곡에 어울리는 다양한 해석을 통해 노래에 숨을 불어넣었다. 그중에서도 ‘Sanctify’의 카리스마, ‘Hallelujah’의 후반 브리지를 장식하는 폭발적 고음, ‘Preacher’의 귀를 간질이는 팔세토는 반드시 확인해야 할 하이라이트다. 



밴드의 가치를 증명하는 웰 메이드 앨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수작이다. 앨범은 수록곡들의 유려한 멜로디 진행과 올리 알렉산더의 보컬 장악력으로 지루할 틈이 없다. 개별 트랙의 사운드 디자인, 밴드 연주의 미학보다는 음반의 응집력과 통일성에 중점을 둔 결과다. ‘Palo Santo’라는 가상의 세계를 통해 일반적으로는 노래에 담기 힘들었던 이야기까지 가사로 풀어낸 것도 중요한 포인트다. 본 앨범으로써 이어스 앤 이어스, 특히 올리 알렉산더는 독보적인 퀴어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높다. [Communion]이 재능 있는 신인 밴드의 탄생을 알렸다면, [Palo Santo]는 하나뿐인 이들의 가치를 웅변하는 값진 앨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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