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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Aug 17. 2018

굿바이 '소울의 여왕'

아레사 프랭클린의 죽음이 한 시대의 종언처럼 느껴지는 이유

큰 별이 졌다. 2018년 8월 16일, ‘소울의 여왕’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76세. 이미 작년부터 “올해까지만 공연을 진행하고 앞으로는 레코딩에 전념하겠다”며 부분 은퇴를 선언했지만, 이마저 오랜 병마와의 싸움으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올해 들어 예정된 공연 무대를 취소하고, 며칠 전부터는 그의 건강에 관한 심상찮은 언론 보도가 이어지며 작별이 머지않았음을 예감했으나,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의식을 회복해 안정을 찾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한숨을 돌리고 있던 차였다.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동료 가수들과 지구촌 음악 팬들은 마음 깊이 애도하며 추모의 메시지를 띄우고 있다.



생전 그의 앞에선 어떤 보컬리스트도 명함을 내밀지 못했다. 1942년 멤피스에서 태어나 1967년 < I Never Loved a Man the Way I Love You >로 ‘레이디 소울’ 자리에 오른 후 반세기가 넘는 독주였다. 독보적인 테크닉과 성량, 풍요로운 표현 능력은 관계자들과 동료 가수들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노래라면 어디서도 빠지지 않을 오티스 레딩조차 자신의 오리지널을 커버한 아레사 프랭클린의 ‘Respect’(1967)를 듣고 “곡을 빼앗겼다”고 경탄했을 정도다. 


행여 그와 함께 출연하는 공연이라도 잡히면, 모든 가수가 그의 뒤 순서를 극도로 꺼렸다는 후문도 재미있다. 하긴, 누구도 ‘노래의 신’과 직접 비교당하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1998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대신해 단 몇 분의 연습 후 파바로티의 음역에 맞춰 완벽히 소화해낸 ‘Nessun Dorma’는 그의 엄청난 재능을 증명하는 수많은 사례 중 하나다.


그는 세기의 보컬리스트이자 여성과 흑인 사회의 수호자였다. 오티스 레딩의 러브 송 ‘Respect’를 시대에 맞게 재해석, 재창조한 것이 그 시작이다. 페미니즘 운동이 꿈틀대고 공민권 운동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던 때에 발표된 노래는 아레사 프랭클린의 일갈과 같은 가창을 날개 삼아 미국 전역을 휩쓸었다. 


1967년 디트로이트 흑인 폭동 당시, 성난 시위대는 연신 소리 높여 ‘R-E-S-P-E-C-T’를 합창했다. 노래가 인기 차트 1위에 오른 것은 당연했다. 흑인의 현실적인 목소리가 담긴 ‘소울’이 전미 차트 정상에 등극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Respect’ 한 곡만으로도 미국의 흑인 사회는 그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흑인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누구든 여왕의 절창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I never loved a man(The way I love you)’(1967, 9위)를 시작으로 ‘Respect’(1967, 1위), ‘Baby I love you’(1967, 4위), ‘Think’(1968, 7위), ‘Spanish harlem’(1971, 2위) 등 17곡을 빌보드 싱글 차트 10위권에 진입시켰고, 총 73곡의 노래를 100위 안에 밀어 넣었다. 


그의 음악이 인종과 성별을 가렸다면 불가능했을 대기록이다. 그는 작곡과 피아노 연주에도 능한 아티스트였다. 발표된 자작곡의 개수가 많지는 않지만, ‘Think’(1968, 7위), ‘Rock steady’(1971, 9위), ‘Day Dreaming’(1972, 5위) 등 여러 곡이 차트 상단에 올랐다. 엘튼 존은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연마한 그를 두고 “그의 피아노 연주 솜씨는 저평가되었다”면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꼽기도 했다.


젊은 세대에게는 녹슬지 않는 감각의 소유자로도 기억된다. 1985년 영국의 신스팝 듀오 유리드믹스와 함께한 여성주의 송가 ‘Sisters are doin’ it for themselves’, 1987년에 조지 마이클과 배출한 넘버원 히트 ‘I knew you were waiting(For me)’, 1989년에 각각 엘튼 존, 휘트니 휴스턴과 입을 맞춘 ‘Through the storms’, ‘It isn’t, it wasn’t, it ain’t never gonna be’ 등 당대 인기 가수와의 듀엣을 즐겼다. 


1998년에는 음악 전문 케이블 채널 VH1의 프로그램 < Diva’s Live >에 출연해 후배 디바들과 함께 그의 골든 히트를 재조명했고, 2010년대에는 아델의 인기곡 ‘Rolling In The Deep’을 취입해 밀레니얼 세대와 호흡했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안주하지 않았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예술인’, ‘역대 최고의 가수’라는 찬사는 결코 빈말이 아니다. 하나뿐인 ‘소울의 여왕’으로서 감히 넘볼 수 없는 궤적을 그려왔고, 경이로운 가창력과 함께 잊을 수 없는 노래들을 남겼다. ‘Respect’로 시작된 아레사 프랭클린의 영향력은 버락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부터 지금의 비욘세, 앨리샤 키스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유효하다. 


어쩌면 1970년대 이후 미국 사회 주류의 흑인들은 대부분 그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7년 여성 가수 최초 < 로큰롤 명예의 전당 > 입성, 그래미상 18회 수상 등 그의 수많은 기록은 이러한 발자취 중 일부일 뿐이다. 아레사 프랭클린의 죽음이 한 시대의 종언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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