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상상력으로 빚어낸 듀오의 야심작
미국 오하이오 출신의 듀오 트웬티 원 파일럿츠(twenty one pilots)는 2016년의 발견이었다. 언더그라운드 데뷔 앨범 [Twenty One Pilots](2009)부터 세 번째 정규 앨범이자 첫 번째 메인스트림 앨범이었던 [Vessel](2013)까지 이들은 무명의 시기를 보냈다. 조금씩 이름이 알려진 것은 그 이후였다. [Vessel]에서 가능성을 증명한 덕에 폴 아웃 보이(Fall Out Boy)와 패닉 앳 더 디스코(Panic! at the Disco)의 합동 투어, 파라모어(Paramore)의 월드 투어에서 오프닝 무대를 맡아 곳곳의 음악 팬들과 만난 것이다. 네 번째 앨범 [Blurryface](2015)의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는 그에 따른 보상과 같았다.
앨범의 흥행만큼 값진 건 히트곡의 탄생이었다. 음반 발매 후 6개월이 지나 싱글로 발매한 ‘Stressed Out’이 그 포문을 열었다. 노래는 특별한 이벤트, 프로모션 없이 입소문만으로 차츰 인기를 얻더니, 마침내는 빌보드 싱글 차트 2위에 올랐다. 비록 저스틴 비버(Justin Bieber)의 ‘Love Yourself’에 막혀 정상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히트곡이 한 곡도 없던 팀으로서는 놀라운 쾌거였다. 현실에서의 스트레스와 중압감을 피해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내용을 담은 노래는 많은 이의 공감과 지지를 얻으며 꾸준한 사랑을 받았고, 2016년 연간 차트 5위에 등극했다. 단연코 그 해를 대표하는 노래였다.
‘Stressed Out’의 돌풍은 ‘Ride’와 ‘Heathens’의 인기로 이어졌다. 레게와의 결합으로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 ‘Ride’는 빌보드 싱글 차트 5위, 2016년의 기대작이었던 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Suicide Squad)]의 주제곡 ‘Heathens’는 2위를 차지했다. 특히 두 곡은 2016년 9월 10일 차트에서 나란히 4위(‘Heathens’)와 5위(‘Ride’)에 오르기도 했는데, 덕분에 이들은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와 비틀스(The Beatles)에 이어 ‘차트 5위권에 2곡 이상 진입시킨 세 번째 록 가수’로 기록됐다. 이듬해 그래미 시상식은 듀오에게 ‘베스트 팝 듀오/그룹 퍼포먼스 상’을 선사했다. 데뷔 5년 만에 상업과 비평을 아우르는 성과를 달성한 이들은 한동안 가라앉아 있던 밴드 시장에 오랜만에 등장한 유망주였다.
물론 트웬티 원 파일럿츠를 전통적 개념의 록 밴드라고 보기는 어렵다. 보컬과 키보드, 신시사이저를 담당하는 타일러 조셉(Tyler Joseph), 타악기를 도맡는 조쉬 던(Josh Dun)의 구성부터 그렇다. 듀오의 특성상 라이브 무대에서는 시퀀서를 큰 폭으로 활용한다. 음악적 스타일도 록과 힙합을 양 축으로 일렉트로닉, 댄스, 레게, 얼터너티브 록을 오가는 하이브리드의 형태다. 그들 스스로는 ‘정신분열 팝(Schizoid Pop)’이라고 정의한다. 정교한 프로그래밍으로 개성 강한 사운드를 구현하는 와중에도 생생한 멜로디를 잃지 않는 것은 이들의 강점이다. 한 가지로 정의하기 어려운 다양한 성격이 트웬티 원 파일럿츠의 캐릭터를 이룬다.
이들은 성공적인 주류 시장 안착에 힘입어 대대적인 월드 투어를 개최하며 더욱 입지를 굳혔다. 차기작에 대한 기대감 역시 자연스레 높아졌다. 멤버 타일러 조셉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투어 중간에도 신보에 대한 구상을 쉬지 않았다”면서 ‘전작보다 빠른 템포의 곡이 있을 것이다’, ‘가사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다’는 등의 힌트를 건넸다. 여기에 공식 홈페이지 곳곳에 새 앨범에 대한 단서를 숨기고 팬들에게 그 의미를 찾도록 유도하는 이색 마케팅도 펼쳤다. 네 곡의 사전 발매를 거쳐 마침내 공개된 정규 5집 [Trench]는 여느 때보다 높은 집중도, 정교한 완성도를 뽐낸다. 감히 이들의 최고작이라고 할 만하다.
[Trench]
본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콘셉트 앨범이란 것이다. 타일러 조셉은 새 앨범을 위해 ‘데마(Dema)’라는 가상의 공간을 설정했다. 데마는 ‘침묵의 탑(Tower of silence)’으로 번역되는 ‘다흐마(Dakhma)’의 페르시아어로,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에서 조장(鳥葬)을 위해 사용되었던 건축물이다. 앨범 표지의 독수리 또한 여기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Trench] 속 데마는 침묵의 탑에서 착안한 형태의 가상도시다. 9명의 주교(Bishop)가 통치하는 이곳에서 클랜시(Clancy)라는 인물이 투쟁 집단 반디토스(Banditos)의 도움을 받아 탈출하는 이야기가 음반의 핵심이다.
언뜻 복잡해 보이는 내러티브는 간단한 은유에서 출발한다. 앨범의 배경이 되는 데마의 원관념은 현대인의 고질병인 우울증이다. 데마를 지배하는 주교들은 우울증의 원인이 되는 여러 심리적 요소를, 레지스탕스인 반디토스는 여기서 벗어나도록 돕는 치료, 약물 등의 장치와 도구를 상징한다. 멤버 조쉬 던은 인터뷰를 통해 “새 앨범은 전작 [Blurryface]의 연장선에 있다”고 밝히며 “약간 확대된 것이면서 완전한 줄거리를 갖고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직전의 ‘Stressed Out’, ‘Ride’, ‘Tear in My Heart’, ‘Heavydirtysoul’ 등에서 풀어냈던 내면에 관한 테마를 인과 관계가 있는 한 편의 이야기로 발전시킨 셈이다.
이러한 앨범의 줄기는 수록곡 중 처음으로 공개된 ‘Jumpsuit’와 ‘Nico and the Niners’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점프슈트는 압박으로부터 화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Jumpsuit’), 강하고 견고한 점프슈트를 입은 화자는 주교를 피해 데마에서 도망치며 ‘데마는 우리를 통제할 수 없다’고 외친다(‘Nico and the Niners’). 한편으로는 ‘우린 이겨낼 테지만 모두가 벗어나진 못 할 것’이라며 반드시 낙관적이지만은 않은 상황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조건 없는 연대와 뒷받침을 약속하는 ‘My Blood’ 또한 의미심장하다. 음반의 면면은 데마라는 가상세계로 표현한 우울증, 마음의 병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밀도 높게 그리고 있다.
가사를 떼어놓고 음악만 봐도 앨범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록과 힙합의 하이브리드로 대표되는 듀오의 속성을 바탕으로, 마이너 음계를 중심으로 톤을 조절하고 소리가 튀는 지점이 없도록 매끈하게 다듬어 응집력을 높였다. 디스토션 기타와 육중한 드러밍이 맹공을 펼치는 첫 곡 ‘Jumpsuit’부터 압도적이다. 소리 다발의 총공세 끝에 이어지는 타일러 조셉의 샤우팅은 앨범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다. 바로 이어지는 ‘Levitate’는 ‘Jumpsuit’에서 부드럽게 넘어가도록 긴밀하게 맞춘 편곡이 눈에 띈다. 콘셉트 앨범 특유의 몰입감을 위한 것이다. 웰 메이드 프로덕션의 증거다.
‘Chlorine’은 히트곡 ‘Heathens’의 기조를 잇는다. 유려한 멜로디와 진행, 짜임새 있는 구성 덕에 5분이 넘는 러닝타임에도 지루함이 없다. ‘Nico and the Niners’는 ‘Ride’가 떠오르는 레게 퓨전으로 이들이 자랑하는 ‘융합의 미학’과 상통한다. ‘Levitate’, ‘My Blood’와 더불어 근사한 신스 사운드를 들려주는 ‘Bandito’는 어떤가. 5분 30초에 달하는 곡은 중반을 넘길 때쯤 어여쁜 신시사이저와 함께 템포를 높이며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전환한다. 귀에 꽂히는 음악을 만드는 솜씨는 ‘Pet Cheetah’에서도 확인된다. 힙합과 일렉트로닉, 댄스 팝을 오가는 노래는 수록곡 중 가장 캐치한 힘을 지녔다. 브라스와 우쿨렐레를 활용한 ‘Legend’, 웅장한 음향을 운용하다 극도의 서정성으로 대미를 장식하는 ‘Leave The City’까지 음반은 트웬티 원 파일럿츠의 너른 스펙트럼을 오롯이 담고 있다.
음악성과 창의성의 완벽 조화
[Trench]는 3년 전 팀의 성공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웅변한다. 서로 다른 장르를 한자리에 모으고, 다이내믹한 소리 풍경을 그리면서 난해하게 들리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어느덧 다섯 번째 앨범에 접어든 이들은 이를 능숙하게 해냈다. 코드 진행의 측면에서도 만듦새는 뛰어나다.
특별히 본 앨범은 스토리텔링까지 완수해 의미가 깊다. ‘Car Radio’, ‘Stressed Out’ 등 본래 진솔한 가사도 팀의 인기 요인이었지만, 이번엔 한 장의 앨범으로 이야기를 확장해 흡인력을 높였다. 이들이 조로아스터교의 침묵의 탑까지 동원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Trench]는 트웬티 원 파일럿츠의 경력 중에서도 남다르게 기억될 야심작이다. 음악성과 창의성, 무엇 하나 모자라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