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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Aug 31. 2019

[Norman Fucking Rockwell!]

라나 델 레이 음악의 정점

Lana Del Rey [Norman Fucking Rockwell!]

라나 델 레이 음악의 정점



싱어송라이터 라나 델 레이의 색은 누구보다 선명하다. 습기를 머금은 목소리, 가사를 흘리듯 뭉개는 발음, 음울과 몽환을 오가는 음향이 그를 대표한다. 이와 같은 성질이 결코 대중적이진 않다. 발매와 동시에 돌풍을 일으킨 메이저 1집 [Born To Die](2012)를 제외하면 그의 노래가 인기 차트에서 높은 순위를 점한 적은 없다. 빌보드 차트에서 유일하게 톱 텐에 오른 히트곡 ‘Summertime Sadness’(2013)는 프랑스의 DJ 세드릭 저바이스(Cedric Gervais)의 리믹스로 반응을 얻었다. 22위까지 올랐던 ‘Young and Beautiful’(2013)은 영화 [위대한 개츠비](2013)에 삽입되어 알려졌다. 이외에는 톱 40은커녕 100위 안에도 들지 못한 곡들이 대다수다.


그럼에도 음악 팬들에게 라나 델 레이의 존재감은 절대적이다. 지금까지 그가 메인스트림에서 발표한 4장의 앨범은 노래의 히트 여부와 관계없이 모두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1위 혹은 2위에 올랐다. [Born To Die]는 발매 이후 300주 이상 빌보드 차트에 머무르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는 비단 미국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전 세계에서 집계된 그의 음반 판매량은 천만 장이 넘고, 매년 유수의 글로벌 음악 페스티벌에 공연자로 초대받아 무대에 오른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각종 소셜 미디어 채널의 구독 인구는 수천만에 달한다. 대중에 각인된 히트곡이 부족할지언정, 열성적인 지지자는 상당하다는 방증이다.



그간 그의 행보와 음악을 생각하면 이러한 괴리도 납득이 간다. 돌이켜보면 그는 시대와는 반대로 움직일 때가 많았다. 일렉트로닉 댄스, 힙합이 한창일 때 ‘할리우드 새드 코어’를 표방하며 비주류의 작법을 동원했고, 팝 차트의 많은 노래가 라디오와 디지털 시장을 겨냥해 3분 내외로 러닝타임을 맞출 때 그는 하고 싶은 만큼 곡의 길이를 늘였다. 그는 최근 빌보드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한 번도 지름길을 택한 적이 없다고 말하며 성공을 위해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라나 델 레이의 음악은 늘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그만의 음악이었다.


신보 [Norman Fucking Rockwell!] 역시 그렇다. 통산 여섯 번째 정규 앨범인 본작은 그의 지난 앨범들처럼 비타협적이다. 이번에도 히트를 위한 노림수는 없다. 대놓고 10분에 달하는 곡을 수록하는가 하면, 개인적인 일화에서 과감한 사회적 메시지에 이르는 가사의 내러티브도 천차만별이다. 음악적으로는 지난 4장의 앨범을 아우른다. [Born To Die]와 [Ultraviolence](2014)의 우울감, [Honeymoon](2015)의 낭만적 재즈, [Lust for Life](2017)의 힙합과 팝 감각이 고루 담겼다. 트랙마다 한 편의 영화를 본 듯 생생한 몰입감을 제공하는 특유의 ‘시네마틱 사운드’는 최고 수준이다. 말하자면 [Norman Fucking Rockwell!]은 라나 델 레이 음악의 정점이다.



Inside of [Norman Fucking Rockwell!]

우선 독특한 앨범 커버부터 살펴보자. 그동안 라나 델 레이의 음반 표지는 일정한 형식을 유지해왔다. 반드시 자동차와 함께했고 대개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이번엔 다르다. 그의 앨범으로는 처음으로 다른 이를 대동했고, 자동차가 아닌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에 올랐다. 배우 잭 니콜슨(Jack Nicholson)의 손자 듀크 니콜슨(Duke Nicholson)이 함께한 표지에서 라나 델 레이는 카메라를 응시하며 배에 올라타라는 듯, 한 손을 내밀고 있다. 이에 대해 그는 빌보드와의 인터뷰에서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기 위한 연출이었다고 밝혔다. 배경에 대해선 ‘바다는 지구상 마지막 남은 자유 공간’이라던 헤밍웨이의 말을 인용하며 자유의지에 관한 의미를 간접적으로 설명했다.


표지만큼이나 앨범의 제목도 강렬하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의 일러스트레이터 노먼 록웰(Norman Rockwell)의 이름을 딴 음반 제목은 곡 작업 과정에서 우연히 나왔다. 라나 델 레이는 수록곡 ‘Venice Bitch’의 한 구절에 들어갈 만한 화가의 이름을 찾던 중, 아메리칸 드림에 의문을 품고 문제를 제기했던 노먼 록웰의 작품관이 자기 생각과 비슷하다고 여겼다. ‘Venice Bitch’의 가사에 실린 그의 이름은 곧 ‘Norman Fucking Rockwell’이라는 또 다른 수록곡의 창작에도 영감을 줬다. 앨범 제목은 해당 곡을 흡족하게 생각한 라나 델 레이의 의견으로 결정됐다.


잭 안토노프(좌), 라나 델 레이(우)


신보에서 중대한 역할을 한 인물은 잭 안토노프(Jack Antonoff)다. 최근 테일러 스위프트(Taylor Swift), 로드(Lorde) 등과의 협업으로 유력한 히트 메이커로 떠오른 그가 먼저 러브콜을 보냈다. 라나 델 레이는 이미 다른 가수와의 작업량이 많았던 그와 합동으로 음악을 만든다는 것에 회의적이었지만, 그가 만들어온 10분여의 트랙을 듣고는 즉각 새 앨범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한다. 이후에는 “유쾌한 잭 덕분에 산뜻한 분위기에서 작업했다”고 소감을 밝혔을 만큼 두 아티스트의 호흡은 안정적이었다. 라나 델 레이의 오랜 파트너인 릭 노울스(Rick Nowels) 등 몇몇 뮤지션도 힘을 보탰지만, [Norman Fucking Rockwell!]의 방향은 사실상 라나 델 레이와 잭 안토노프 두 사람이 결정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수록곡을 단둘이서 만든 이들은 앨범 곳곳에서 뛰어난 ‘케미스트리’를 뽐낸다. 앨범과 동명의 타이틀 곡 ‘Norman Fucking Rockwell’은 피아노와 첼로, 바이올린과 색소폰 등을 조화롭게 배치해 오케스트럴 팝의 맛을 냈고, 작년 9월에 가장 먼저 싱글로 공개된 ‘Mariners Apartment Complex’는 라나 델 레이의 개인적인 경험을 사이키델릭 사운드가 가미된 포크로 풀어냈다. 앨범의 중간에서 각기 다른 사운드 스케이프로 섬세한 감정선을 그리는 ‘Love Song’, ‘Cinnamon Girl’, ‘How to Disappear’는 음반의 응집력을 높이는 구심점이다. 고요한 피아노 연주만으로 진행되는 ‘hope is a dangerous thing for a woman like me to have – but i have it’은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난해한 이야기의 끝에서 희망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며 앨범의 대미를 장식한다.


'Venice Bitch'


재생 시간이 9분 37초에 달하는 ‘Venice Bitch’는 그중에서도 완벽한 콤비 플레이의 결과물이다.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멜로디를 중심으로 전반부가 지나면 일렉트릭 기타와 신시사이저가 차례를 이어받아 사이키델릭 음향을 쌓는다. 차츰 부피를 키워가며 격렬해지는 프로덕션과 메아리치듯 곡을 휘감는 보컬의 어울림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라나 델 레이가 10분에 가까운 이 노래를 싱글로 내고 싶다고 했을 때, 그의 매니저는 극구 만류했다고 한다. “그냥 3분짜리 팝송을 싱글로 내자”는 매니저의 말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누군가는 여름의 끝 무렵에 10분간 멍하니 일렉트릭 기타 소리에 취해 드라이브하고 싶어 할지도 몰라". 그의 뜻대로 노래는 지난해 9월, 앨범의 두 번째 싱글로 발표됐고 마니아와 평단의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듣는 이의 귀를 적극적으로 낚아채는 곡도 있다. 랩을 하듯 빠르게 내뱉는 가창과 서프 록 스타일의 느긋한 드럼이 인상적인 ‘Fuck It, I Love You’, 하프와 오르간을 활용해 더욱 생동감 있는 소리 풍경을 그린 ‘California’, 당초 전작 [Lust For Life]에 실릴 예정이었던 ‘The Next Best American Record’의 선율은 여느 곡보다 선명하다. 1990년대 미국의 스카 펑크 밴드 서브라임(Sublime)의 곡을 근사하게 커버한 ‘Doin’ Time’은 말할 것도 없다. 서브라임의 원곡이 샘플 소스로 쓰인 조지 거슈윈(George Gershwin)의 오페라 [포기와 베스](1935) 중 ‘Summertime’의 가사를 ‘Doin’ time’으로 바꿔 재미를 줬다면, 라나 델 레이는 이를 그대로 살림으로써 자신의 히트곡 ‘Summertime Sadness’를 은근히 떠오르게 유도했다.


'Fuck It I Love You' & 'The Greatest'


특기해야 할 곡은 ‘The Greatest’다. ‘Fuck It, I Love You’와 함께 싱글로 발표된 노래는 수록곡 중 가장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장조의 밝은 음계에서 희뿌연 기타 톤과 물을 먹은듯한 피아노, 여유로운 드럼과 옅은 현악이 어우러져 빈티지한 서프 록이 탄생했다. 비치 보이스(The Beach Boys)와 이들의 히트곡 ‘Kokomo’(1988),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의 ‘Life on Mars’(1971)를 직접 인용한 가사에선 현대 사회가 마주하고 있는 각종 위기를 중의적으로 경고한다. 특히 ‘카니예 웨스트는 금발이 되어 떠났다’고 말하며 그의 트럼프 행정부 지지 행보를 비판한 마지막 구절은 노래의 하이라이트다.



2019년의 주요 작품으로 기억될 앨범

라나 델 레이는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 초기 앨범과 비교하면 음악과 담론 모두 성장했다. 가창과 작법 등 음악적 개성은 유지하면서도 다채로운 사운드 디자인을 갖췄고, 개인의 감정을 풀어내는데 집중하던 노랫말은 주변과 사회로 확장됐다. 


[Norman Fucking Rockwell!]은 아티스트의 물오른 역량을 완벽히 증명한다. 유행과 흥행에 연연하지 않고 묵묵히 작품 세계를 키워온 결과이기에 더욱 뜻깊다. 빼어난 대중 감각을 지닌 파트너 잭 안토노프와의 공조 역시 완성도를 높이는데 한몫을 했다. 감히 라나 델 레이의 최고작이라 해도 무방하다. 우리는 지금 2019년의 주요 작품으로 기억될 싱어송라이터의 앨범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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