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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Nov 13. 2019

불공정하게 이루어진 불공정 게임

<프로듀스> 사태에 관한 단상

고백하건대, 단 한 번도 엠넷의 <프로듀스> 시리즈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더 솔직히 말하면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다. 시청자의 투표만으로 아이돌 그룹을 조직한다는 발상부터 꺼림칙했다. 101명이 우르르 나와 같은 표정을 짓고는 무작정 자신을 뽑아 달라며 교복을 입고 춤을 추던 첫 무대는 기괴하기까지 했다. 참가자들의 등급에 따라 구역을 나누고, 각기 다른 높이의 무대에 세워뒀던 모습은 또 어떤가. 연습생이 필요한 건 오직 시청자의 투표뿐이었고, 방송엔 명백히 갑(시청자)과 을(참가자)이 존재했다.


<프로듀스>가 탐탁지 않았던 결정적 이유는 방송이 앞장서 불공정한 게임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가장 큰 이점은 데뷔 전인 일반인 참가자가 시청자와 유대 관계를 맺고 서사를 쌓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중의 입장에선 얼굴도 이름도 사연도 모르는 신인보다 방송을 통해 사전 정보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이에게 관심이 몰릴 수밖에 없다. 여기까진 좋다. <프로듀스>를 제작한 씨제이가 우승팀의 음반을 제작, 유통까지 한 게 문제였다. 일부 멤버는 매니지먼트까지 맡았다. 방송 프로그램으로 출발선을 전진 배치한 거로 모자라, 제작의 수직계열화로 '넘사벽' 차이를 만들 속셈이었다.


위에서부터 아이오아이, 워너원, 아이즈원


대기업의 문화 권력 뽐내기는 의도대로 됐다. 아이오아이, 워너원, 아이즈원, 엑스원에 이르는 씨제이의 총아들은 가요계를 휩쓸었다. 신인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데뷔와 함께 동시대 인기 가수들을 턱밑까지 추격했다. 이들의 수익성을 확인하자 욕심도 커졌다. 최초 1년을 기약했던 우승팀의 활동 기간은 네 개의 시즌을 거치며 5년까지 늘어났다. 케이팝 역사 속 많은 아이돌 그룹의 전성기가 5년 내외였던 걸 생각하면 사실상 전성기 내내 수중에 놓겠다는 말이었다. 그 와중에 눈에 띄는 음악적 성과는 없었다. 그룹은 짧은 활동 기간 안에 최대한의 수익을 올리기 위해 소모적인 팝송에 주력했다. 노래는 한 철 차트를 장악하곤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최근 들려온 <프로듀스>의 순위 조작 소식은 그래서 더욱더 충격적이다. 불공정을 조장하던 프로그램이 근본부터 공평하지 않았다는 것에 분노가 치민다. 전도유망한 젊은 청년들을 줄 세워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한 비인간적 무차별 경쟁에 내몰아 놓고, 결과는 뒷돈 주고받기와 유흥, 접대로 정해놓았다는 게 참담하다. 이는 어른으로서 해선 안 될 젊음의 착취, 나아가 순수한 꿈과 희망의 말살 행위다. 그동안 뒤에선 이러한 패악질을 저지르고 다닌 이들이 앞에서는 ‘문화 기업’이라는 기치를 내세우며 대중을 우롱했다. 오디션 프로그램, 방송 역사에 길이 남을 초유의 사례다. 


구속된 안 모 PD


이 일로 <프로듀스> 시리즈를 제작한 책임 프로듀서 2명이 구속됐다. 이어서 씨제이 이앤엠 본사 고위직 관계자를 포함한 제작진, 기획사 관계자 등 10여 명이 입건됐다고 전해진다. 프로그램 출신의 아이즈원과 엑스원은 활동에 제동이 걸렸다. 아이즈원의 앨범 발매와 컴백은 무기한 연기됐다. 해체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룹의 팬들에겐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다. 일부 팬들은 음반의 환불을 거부하며 끝까지 기다리겠다는 순정을 보이고 있지만, 현재로선 이들의 앞날을 보장할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다. 모른 척 활동을 강행할 수도, 단호히 해산을 선언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제작진과 방송사, 조작에 가담한 기획사를 제외한 모든 이가 피해자다. 사비를 들여가며 투표에 참여했던 프로그램의 애청자부터 데뷔 팀의 팬, 데뷔하지 못한 이들의 팬, 그룹의 활동과 생계가 연관된 모든 이들이 이번 <프로듀스> 사태로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보았다. 이번 일로 대중 사이에서 오디션 프로그램 전반에 대한 불신이 생긴 건 덤이다. 조작 정황이 확인된 시즌 3, 4로 인해 <프로듀스>의 이전 시즌은 물론, 엠넷이 지난 몇 년간 방송한 오디션 프로그램들에도 의심의 눈초리가 생기고 있다. 관련자를 엄벌하는 것으론 부족하다. 엠넷은 더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눈독 들이지 말아야 한다. 십여 년간 오디션 명가를 자처했던 방송사의 부끄러운 말로다.


엑스원


2019.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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