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민재 Feb 07. 2020

2010년대의 케이팝을 돌아보다

빌보드 코리아 매거진 2호 기고

1990년대에 발아한 케이팝은 2010년대를 거치며 완전히 꽃피웠다. 콘텐츠로서의 양식과 개성, 산업으로서의 가치를 두루 갖춘 것이다. 한국 대중음악을 모호하게 가리켰던 과거의 케이팝과 달리, 현재 케이팝은 여러 장르의 융합과 변주를 바탕으로 발전한 한국의 메인스트림 팝을 지칭하는 말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그 사이 음악 시장의 규모 또한 빠르게 성장했다. 2009년 글로벌 랭킹 14위였던 한국은 2018년 6위에 안착했다. 


한국은 지금 전 세계에서 음악 시장의 성장세가 가장 두드러지는 국가 중 하나다. 당연히 케이팝의 위상도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일종의 하위문화, 마니아들의 전유물에 불과했던 케이팝은 현재 전 세계 음악 관계자와 팬들의 집중 주목 대상이다. 2011년 미국 빌보드가 케이팝 차트를 신설하고, 이듬해 영국 옥스퍼드 사전이 ‘케이팝’이란 단어를 등재한 건 케이팝의 약진을 예견한 결과다. 미국 대중음악의 상징과도 같은 엠티비(MTV)가 2019년부터 비디오 뮤직 어워즈의 ‘베스트 케이팝’ 부문을 마련한 건 어떤가. 해외의 각종 시상식과 음악 축제에 한국 가수들이 초청받는 건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침내 케이팝은 아시아에 한정하던 영향력을 세계로 넓혔다.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북미와 중남미, 유럽을 아우르며 공연을 펼치는 케이팝 가수도 생겼다. 개중엔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의 위치에 성큼 다가선 팀도 있다. 과거 우리 청소년들이 뉴 키즈 온 더 블록, 백스트리트 보이스, 브리트니 스피어스에 열광한 것처럼, 지금 국제 사회의 청소년들은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 트와이스에 환호한다. 이렇듯 케이팝의 지난 10년은 눈부신 성공의 역사였으나, 한편으로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맹점을 노출하며 아쉬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성취와 한계가 분명했던 2010년대의 케이팝을 다각도로 정리한다.


◆ 음악 영토를 확장하다

당초 케이팝은 댄스 음악에 국한됐다. 이는 태생적 특성이었다. 1990년대 중화권에서 인기를 얻은 남성 댄스 듀오 클론과 뒤이은 에이치오티(H.O.T.)의 인기몰이를 계기로 케이팝이란 용어가 통용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한동안 지속됐다. 클릭비, 더 트랙스 등 록 밴드를 표방한 팀도 있었지만, 실제 밴드의 기능을 수행하기보단 콘셉트의 차별화를 위한 수단에 가까웠다. 동방신기, 천상지희, 더블에스501(SS501), 슈퍼주니어 등이 활약한 2000년대 중반까지 아이돌 음악, 케이팝은 곧 댄스 음악이었다.



일변도에 변화가 감지된 건 그 이후다. 2006년 빅뱅, 2007년 FT아일랜드, 2008년 2AM이 차례로 데뷔하면서다. 각각 힙합, 록, 발라드를 근간으로 한 이들은 장르의 특성과 케이팝의 기존 문법을 조화하며 케이팝의 외연을 넓히는 데 일조했다. 케이팝의 중심축이었던 댄스에 갈래가 생긴 것도 이 무렵이다. 원더걸스는 레트로에 몰두했고, 에프엑스(f(x))는 일렉트로닉과 아방가르드를 정체성 삼았다. 케이팝은 새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이들이 열어젖힌 2010년대는 여느 때보다 풍요로웠다. 2000년대 후반의 흐름을 따라 다양한 장르가 케이팝에 이식됐다. 씨엔블루, 데이식스, 엔플라잉과 같은 록 밴드가 나오는가 하면, 비에이피(B.A.P), 방탄소년단, 위너, 아이콘, 블랙핑크, 엔씨티(NCT) 등 힙합을 기반으로 삼은 그룹이 줄을 이었고, 뭄바톤을 앞세운 카드(Kard), (여자)아이들처럼 이국적인 사운드를 특기로 하는 팀까지 등장했다. 여기에 각 스타일을 합치고 융화하며 자체적인 양식을 발전시킨 것이 포인트다. 장르의 컨버전스를 꾀하는 한편, 버스(verse)와 후렴, 브리지(bridge)에서 서로 다른 템포, 음향을 접목해 한 곡 안에서도 변화를 연출하는 것이다. 팝 가수 리아나(Rihanna)가 데모 상태의 ‘Red Light’(2014)를 듣고 이 노래는 케이팝 그룹에 어울린다며 거절해 에프엑스가 해당 곡을 취입한 일화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음악적 번영에는 제작진의 변화도 역할을 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작곡가, 프로듀서를 초대해 국내에서 함께 곡을 만드는 ‘송 캠프’ 시스템이 결정적이었다. 에스엠(SM) 엔터테인먼트가 주도한 국제 합작 방식은 샤이니의 <The Misconceptions of You>(2013), 에프엑스의 <Pink Tape>(2013) 같은 웰메이드 결과물로 이어졌다. 이제 해외 음악가의 케이팝 작업 참여는 여러 기획사에서 흔히 이루어지고 있다. 작곡과 프로듀싱에 참여하는 아이돌이 많아진 것도 주목할 점이다. 강타, 지드래곤(G-Dragon) 등 과거 드물었던 아이돌 싱어송라이터는 이제 각 팀에 하나씩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꾸준히 나타나며 그들이 속한 팀의 향방을 결정했다.


◆ 글로벌 음악 시장의 화두가 되다

2000년대까지 케이팝의 영향력은 아시아에 머물렀다. 일부 가수가 미국 진출을 시도했으나 만족할 만한 결실은 마땅치 않았다. 에스엠 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들은 2010년부터 미주와 유럽에서까지 합동 공연을 개최하며 마니아를 모으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서구 대중에게 케이팝의 존재는 생소했다. 그 벽을 처음 뚫은 건 단연 싸이였다. ‘강남 스타일’(2012)은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2위에 오르는 성과를 거뒀고, 말춤으로 세계인을 단결시켰다. 미국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Barak Obama), 팝의 여왕 마돈나(Madonna) 등 각계각층의 유명인들까지 앞다퉈 열광했다.



‘싸이 효과’는 특히 아시아 밖에서 주효했다. ‘강남 스타일’과 ‘Gentleman’(2013)의 연속 히트와 함께 소녀시대, 빅뱅 등 당대의 인기 케이팝 그룹에도 시선이 쏠렸다. 급속도로 상승한 유튜브 조회 수와 빈번해진 해외 보도가 이를 증명했다. 소녀시대는 2013년, 빅뱅은 2014년에 각각 ‘Gee’(2009)와 ‘Fantastic Baby’(2014)로 조회 수 1억을 달성하며 전례 없는 주목도를 실감케 했다. 직접 현지를 찾는 한국 가수도 늘어났다. 2012년에 시작된 씨제이 이엔앰(CJ ENM)의 케이팝 합동 콘서트 ‘케이콘(KCON)’은 톱 가수부터 유망주까지 한자리에 모아 소개하는 허브 역할을 하며 케이팝 팬덤을 키웠다. 2014년 신인 그룹 방탄소년단을 미국 팬들과 언론에 소개한 자리 역시 케이콘이었다.


방탄소년단의 글로벌 스타덤은 즉시 케이팝의 새 역사가 됐다. 한 철 신드롬에 그친 싸이와는 궤가 달랐다. 역동적인 퍼포먼스, 탄탄한 라이브로 무명 시기에도 무대에 오를 때마다 화제를 모았던 이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한 활발한 소통, 또래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솔직한 가사로 남다른 반응을 얻었다. 우후죽순 생겨난 ‘아미(Army)’들은 곧 그룹의 차트 기록, 수상 실적, 콘서트 수익 등을 전부 우리 음악 사상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방탄소년단이 촉발한 케이팝 붐은 블랙핑크, 슈퍼엠(SuperM), 몬스타엑스, 갓세븐, 카드 등으로 번지며 ‘코리안 인베이전(Korean Invasion)’의 모양새를 띄고 있다.



세계 시장에서 케이팝이 거둔 성과는 음악 외적 마케팅과 플랫폼 활용의 승리이기도 하다. 기획사가 앞장서 팬클럽의 이름을 붙이고 아티스트의 공식 색깔, 응원봉 등의 응원 도구를 정해 소속감, 일체감을 끌어내는 국가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국적이 달라도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면 어디에 사는 누구라도 ‘아미’가 되고, 엑소를 응원하면 ‘엑소-엘(EXO-L)’이 된다. 그렇게 하나가 된 초국적 팬클럽은 아이돌의 판매고를 위해 음반을 중복 구매하고 ‘무한 스밍(스트리밍)’을 행하며 소셜 미디어상에서 공격적인 홍보 활동을 펼친다. 국내 아이돌 업계가 사활을 걸어온 팬클럽 관리가 해외에서도 통한 것이다.


기획사와 아이돌은 다양한 소셜 미디어 활동으로 그들에 화답한다. 유튜브에 비하인드 영상, 안무 연습 등의 메이킹 필름을 공개하는 것은 기본, 인스타그램의 라이브 기능을 통해 구독자와 밀착 교감하며, 네이버 브이 라이브(V LIVE)에서 팬들과 긴밀한 소통을 하기도 한다. 리얼리티 시리즈는 없는 팀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다. 여전히 스타의 신비주의, 희소성을 중시여기는 서구의 팝 시장에서는 대부분 흔치 않은 방식이다. 케이팝 스타는 반짝반짝 빛나는 우상인 동시에 친근감을 주는 존재로 틈새시장을 파고들었다.


◆ 이제는 ‘포스트 케이팝’ 시대 준비해야 할 때

케이팝의 눈부신 도약 중에도 고질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수많은 히트, 스타가 탄생한 지난 10년 동안, 많은 케이팝 그룹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7년 징크스’란 용어가 업계와 대중에 인식된 것도 2010년대다. 2009년 많은 기획사가 전속 계약의 최대 유효 기간을 7년으로 조정하면서, 계약 후 7년이 지난 시점 즈음에 여러 그룹이 스러진 것이다. 원더걸스, 카라, 포미닛, 미쓰에이, 시크릿, 레인보우, 씨스타, 2AM, 제국의 아이들, 애프터스쿨, 나인뮤지스 등이 공식 해체하거나 활동을 중단했다. 동방신기, 소녀시대, 인피니트, 에이오에이(AOA), 블락비 등은 멤버 변동을 경험했다.


과도한 스케줄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호소한 이들도 있다.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가인, 이엑스아이디(EXID)의 솔지, 비에이피의 힘찬, 오마이걸의 진이, 트와이스의 미나, 세븐틴의 에스쿱스, 모모랜드의 연우, 위키미키의 유정 등이 건강상의 이유로 활동을 중단하고 한동안 회복에 전념했다. 레이디스 코드, 시크릿, 여자친구, 마마무 등은 이동 중 교통사고를 당해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다. 샤이니 종현은 2017년 우울증으로 세상을 등져 많은 이에게 큰 슬픔을 안기기도 했다. 화려하게 빛나는 듯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많은 아이돌이 인권 사각지대에 놓여있다는 지적이 계속되는 이유다.



이처럼 기획사가 주도하고 그룹을 위주로 한 케이팝 제작은 중단기성과에 몰두하는 경향이 강하다. 캐릭터와 콘셉트 등 비주얼을 앞세워 빠르게 팬덤을 모으고, 흔히 ‘미니 앨범’이라 일컫는 이피(EP) 형태의 음반을 잦은 빈도로 발매하며 연쇄 폭발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접근법은 짧은 기간 안에 최대한의 성취를 맛보기엔 알맞을지언정, 롱런에는 적합하지 않다. 이미지의 소비가 큰 탓이다. 1년에 두세 번 콘셉트만 다른 비슷한 음악으로 컴백하는 팀이 적잖은 현 실정에서 10년 이상 안정적인 인기를 누리며 뚜렷한 음악적 색깔을 갖고 활동하는 팀이 나오기란 대단히 어렵다. 이는 한 그룹의 정체성을 길러 하나의 아티스트로 발전시키기보단, 수익성이 높을 때 최대한의 이익을 창출하고 곧 새로운 팀으로 대체하는 방식을 고집해온 기획사의 태도와 연관이 깊다.


그 과정에서 음악적 고민은 뒷전으로 밀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무리 케이팝이 여타 음악과 구분되는 다양성, 차별성을 획득했다고 해도 케이팝 내에서 비교하면 많은 그룹의 음악이 유사한 지향을 보인다. 조너스 브라더스(Jonas Brothers), 원 디렉션(One Direction)의 음악과 엑소, 방탄소년단의 음악은 분명히 다르나, 조너스 브라더스와 원 디렉션의 차이만큼 엑소와 방탄소년단이 상이한 음악을 하고 있는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하나의 장르에 속하는 모든 뮤지션이 서로 다른 음악을 구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지만, 현재 케이팝은 가창, 사운드 디자인, 작법 등 다방면에서 상당수의 팀이 몰개성의 늪에 빠져있는 상황이다.


지난 10년간 케이팝이 이룬 성과는 괄목할 만하다. 대중음악 역사상 이렇게 급속도로 양적, 질적 팽창을 이뤄낸 음악 신(scene)은 흔치 않다. 성장세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미국의 1950년대 초기 로큰롤, 영국의 1960년대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더구나 케이팝의 글로벌 공습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2020년대에도 음악 시장의 주요 키워드는 케이팝이 될 공산이 크다. 이제는 이후의 ‘포스트 케이팝’을 고려할 때다. 단기간에 주목을 받고 인기를 누리는 방법은 충분히 검증을 끝냈다. 2010년대에 이룬 음악적 성장을 발판으로 장기전을 준비해야 한다. 유행에 좌우되는 소모적 콘텐츠를 넘어 어엿한 대중음악의 한 갈래로 자리 잡을 날을 기대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