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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Apr 01. 2020

H.O.T.가 열어젖힌 새 시대

빌보드 코리아 매거진 3호 기고

1996년 1월 31일.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를 선언했다. 10대들은 곧 아노미 상태에 빠졌다. 당대 청소년에게 서태지와 아이들은 절대적 존재였다. 대체 불가의 우상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모두 보여줬다”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이유로 도인처럼 홀연히 떠나자 10대를 묶는 구심점이 사라졌다. 왕좌의 공백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같은 해 9월, ‘10대들의 승리(High-five Of Teenagers)’를 표방한 다섯 청년이 나타났다. 등장 이후 가요계의 패러다임을 영원히 바꿔놓은 ‘H.O.T.(에이치오티)’다.



이야기의 시작은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1년 떠난 미국 유학에서 4년 만에 돌아온 이수만은 유학 시절 관찰, 열망하며 흡수한 미국 음악의 양분을 가요에 도입하고자 했다. 그는 한국의 바비 브라운을 꿈꾸며 1988년 열여섯 살이던 현진영을 발탁했다. 당시 현진영은 타고난 춤꾼으로 이태원의 문나이트 클럽에서 활동하며 이름을 날리고 있던 시기였다. 곧이어 이수만은 역시 문나이트를 주름 잡던 구준엽과 강원래를 현진영의 댄서로 캐스팅해 바비 브라운식 삼각 편대를 구축했다.


이수만의 첫 번째 야심작 ‘현진영과 와와’는 확실히 달랐다. 데뷔 앨범에 실린 ‘슬픈 마네킹’(1990)은 가요 색깔을 찾을 수 없는 정통의 뉴 잭 스윙이었고, 대히트를 기록한 소포모어 ‘흐린 기억 속의 그대’(1992)는 팀을 서태지와 아이들의 유일한 라이벌로 격상시켰다. 그러나 기쁨은 잠깐이었다. 현진영은 대마초와 필로폰 스캔들로 무너졌다. 1집 활동 후 이미 대마초 흡연으로 징역을 살았던 그는 1993년 또 한 번의 약물 문제로 음악계에서 퇴장해야 했다.


현진영과 와와


이수만의 SM(에스엠) 기획 역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만들어뒀던 현진영의 3집은 전량 폐기됐고, 한동준, 김광진을 비롯한 소속 가수와 연예인, 프로듀서와 작곡가가 속속 회사를 떠났다. 현진영의 스타덤을 이끌었던 작곡가 홍종화마저 SM을 나가자 남은 인물은 ‘그대의 향기’(1993)의 유영진뿐이었다. 위기의 순간 이수만이 떠올린 건 보이 그룹이었다. 1980년대부터 뉴 에디션(New Edition)과 뉴 키즈 온 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의 활약을 목격한 그는 한국의 뉴 키즈 온 더 블록을 만들기로 했다. 이 과정엔 일본 아이돌 시장의 주역 쟈니스 사무소의 영향도 있었다.


SM은 새 그룹을 위해 원석을 찾아 모았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익히 알려진 상태였던 현진영과는 기획의 시작부터 달랐다. 흑인 음악에 뜻을 품고 있던 중학생부터 지역구에서 춤으로 유명하던 고등학생, 청소년 댄스 대회 입상자 등 저마다 잠재력을 지닌 다양한 인물을 선발했다. 이중엔 댄스 그룹 스머프를 거쳐 훗날 래퍼로 성장한 개리, 나중 신화의 멤버로 합류한 앤디 등도 있었다. 이들은 송파구의 연립 주택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수개월의 피나는 연습을 거쳤다.



그렇게 탄생한 H.O.T.는 데뷔 앨범 [We Hate All Kinds of Violence](1996)부터 ‘전사’의 후예를 자처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전사로 여기던 청소년의 입장에선 데뷔곡부터 ‘전사의 후예’인 이들이 남달리 보이는 게 당연했다. 헐렁한 힙합 의상, 학교 폭력을 비판하는 갱스터 랩, 절도 있는 댄스 퍼포먼스는 서태지와 아이들을 연상케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빈자리를 노골적으로 탐낸 셈이다. 이에 대해 강타는 훗날 우상이었던 그들과 비슷한 음악을 하고 있다는 것에 감격했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마음 둘 곳 없던 10대들은 새로운 다섯 전사에게 즉각 반응했다. 첫 방송 이후 무명의 시기는 하루도 없었다. 정식 데뷔 무대였던 MBC의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가 전파를 탄 다음 날, SBS [인기가요]의 등촌동 공개홀 현장에는 이들을 보기 위한 인파가 몰려들었다. 충격의 데뷔를 마친 멤버들은 학교에 가기 위해 집밖을 나선 월요일 아침 수십 명의 팬과 마주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눈 떠보니 스타가 된 것이다. 데뷔 한 달 만에 팬레터가 하루에 세 포대씩 오는 수준에 도달했다.



‘전사의 후예’가 팬덤을 결집했다면, ‘캔디’는 이들을 완벽히 정상에 올려놨다. 형형색색의 옷차림과 환한 얼굴로 노래하고 춤추는 미소년들에게 모두가 마음을 빼앗겼다. ‘캔디’ 신드롬은 H.O.T.의 인기를 중장년까지 확대했다. 털장갑을 비롯한 패션 아이템이 인기를 끌었고, 멤버들의 고유 색깔, 숫자까지 각인됐다. 엉덩이를 들썩이는 파워레이서 춤, 익살스러운 망치 춤 등 아직도 회자되는 그룹의 아이코닉한 안무 중 상당수가 ‘캔디’에서 나왔다. 당시 이들은 ‘틀면 나온다’는 뜻에서 ‘수도꼭지’라는 별명이 생길 만큼 미디어를 점령했다.


이후 그룹은 2001년 해체 전까지 내리 달렸다. 5장의 정규 앨범 중 4장이 백만 장 넘게 팔렸고, 각종 음악 방송과 시상식에서 셀 수 없이 많은 트로피를 챙겼다. 공식 팬클럽의 회원 수는 십만이 넘었다. 이원화 전략을 통한 히트 행진도 계속됐다. 이들은 사회 비판적 노랫말과 어두운 콘셉트로 마니아를 끌어모은 ‘전사의 후예’, 명랑한 이미지와 잘 들리는 멜로디로 대중을 공략한 ‘캔디’처럼 활동마다 상반된 매력을 번갈아 선보였다. 2집 [Wolf and Sheep](1997)의 ‘We are the Future’와 ‘행복’, 3집 [Resurrection](1998)의 ‘열맞춰’(1998)와 ‘빛’(1998)이 대표적이다.



4집 [I Yah!](1999)는 팀의 음악적 정점이었다. 3집부터 곡 작업에 참여했던 멤버들은 이 시기에 이르러 사실상 앨범의 전권을 쥐었다. 유영진이 만든 타이틀곡 ‘아이야!’와 슬로우 잼 ‘The Way That You Like Me’를 제외하면 음반은 멤버들의 자작곡만으로 이루어졌다. 장르를 아우르는 앨범의 구성 또한 탁월했다. 각 노래 사이에 삽입된 인터루드 형식의 토크 트랙이 독특한 흐름을 연출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샘플링 한 ‘아이야!’는 팀의 정체성을 넘어 SM을 상징하는 작법이 됐다. 웅장한 오케스트레이션과 디스토션 기타를 필두로 한 록 사운드, 매서운 사회 비판, 화려한 스타일링으로 무장한 비주얼을 배합해 ‘SMP(에스엠피)’의 공식을 완성했다. ‘SM Music Performance’의 준말인 SMP는 ‘전사의 후예’부터 기초를 다져온 것이었다. 이는 동방신기의 ‘Tri-Angle’(2004), 슈퍼주니어의 ‘돈 돈!(Don’t Don)’(2007), 엑소의 ‘MAMA’(2012)로 이어지는 사풍(社風)으로 남았다.


H.O.T.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침내 전곡을 멤버들만의 힘으로 만든 정규 5집 [Outside Castle](2000)이 나오고 7개월이 지난 2001년 5월, 그룹은 갈라섰다. 석연찮은 마무리에 많은 팬이 아연실색했다. 적어도 이유는 분명했던 서태지와 아이들과 비교하면 더욱 씁쓸한 결말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팬덤이 그랬듯, H.O.T.의 열성 팬들은 연일 SM 사옥 앞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H.O.T.의 해산은 한 시대의 종언과 같았다.


5년이 채 안 되는 짧은 활동 동안 이들은 가요계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아이돌의 기틀을 마련했다면, H.O.T.는 아이돌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1990년대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영향으로 영미에 보이 밴드가 쏟아져 나왔던 것처럼, H.O.T. 이후 가요계엔 수많은 아이돌 그룹이 등장했다. 젝스키스, NRG(엔알지), 태사자, 신화, 클릭비, god(지오디) 등은 모두 H.O.T.의 수혜자다.


젝스키스


그중 특기해야 할 그룹은 젝스키스다. 1987년 3인조 댄스 그룹 소방차를 기획한 이호연은 소방차를 통해 10대를 타깃으로 한 아이돌 음악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이후 대성기획을 차린 그는 은지원과 강성훈의 듀오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H.O.T.가 나왔고 ‘캔디’에 놀랐다. 영리한 제작자였던 그는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고, 5인조였던 H.O.T.보다 한 명이 많은 6인조로 젝스키스를 내놓았다. H.O.T.의 이듬해 데뷔한 젝스키스는 활동 기간 내내 H.O.T.와 경쟁을 펼치며 아이돌 시장의 팽창에 일조했다. 물론 H.O.T.와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기엔 역부족이었으나, 또 다른 개국 공신임은 틀림없다.


H.O.T.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현대적 형태의 케이팝, 아이돌의 문법을 구축했다는 것이다. 비단 음악뿐만이 아니다. 멤버 구성부터 팬클럽 운영 등의 시스템까지 이들로부터 자리를 잡았다. 메인 보컬, 서브 보컬, 래퍼, 댄서 등으로 나뉘는 역할 분담은 현재도 통용되는 아이돌 기획의 기본이다. 유머러스 문희준, 카리스마 장우혁, 큐티 토니안, 도회적 미남 강타, 샤이한 막내 이재원 등 멤버 개개인의 캐릭터 역시 여전히 유효한 매뉴얼이다. 남진과 나훈아, 조용필, 서태지와 아이들 등 이전에도 팬 문화는 분명 있었지만, 기획사가 회비를 걷고 고유의 응원 색깔과 응원 물품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관리한 팬클럽은 H.O.T.가 최초다. 지금의 케이팝 산업에서 적잖은 지분을 차지하는 팬클럽 시스템은 이때 완성됐다.


활동 기간 내에 값진 기록도 여럿 나왔다. H.O.T.는 서울 올림픽 주 경기장에서 최초로 단독 공연을 연 한국 가수다. 1999년 이들이 공연하기 전까지 주 경기장에 홀로 오른 뮤지션은 스티비 원더와 마이클 잭슨밖에 없다. 한국 가수가 중국 베이징에서 단독 공연을 연 것도 처음이었다. 2000년 2월 북경 공인체육관에서 열린 H.O.T.의 콘서트 후 중국 언론은 ‘한류’라는 용어를 동원해 한국 가수와 문화를 조명했고, 곧 아시아를 아우르는 문화 현상으로 자리매김했다. H.O.T.가 본격적인 한류의 선봉장이라는 말은 과언이 아니다. H.O.T.의 공연이 있는 날이면 교육청이 조퇴금지령을 내리고 서울 시내 지하철이 연장 운행을 하던 풍경은 이후로도 사례를 찾기 힘든 진기록이다.



H.O.T. 이후 우리 음악계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가요계는 케이팝과 아이돌의 시대를 개막한 이들로부터 지금까지 영향을 받고 있다. 2010년대 들어 god, 젝스키스, S.E.S. 등 동시대에 활동한 팀들이 하나둘 돌아올 때도 ‘끝판왕’은 H.O.T.였다. 이들은 신곡 하나 없이 올림픽 주 경기장을 이틀간 채웠다. 23년 전 ‘We are the Future’를 부르던 이들은 노래의 제목처럼 스스로 케이팝의 미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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