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tep behind (한여름의 살인)
날씨가 바뀌면, 아니면 날짜가 바뀌면, 손이 가는 책이 있다. 거의 5년쯤 6월이 되면 - 아니면 여름이 시작된다는 기분이 들면 - One step behind (한여름의 살인)를 꺼내 든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아마 8월 정도였지만, 책 안의 사건은 하지에서 시작하니까. 7월이 되면, 아니면 8월이면 2년에 한 번 정도는 푸코의 진자를 꺼낸다.
작년 7월에 Savage garden을 읽었다. 브뤼헤에 2박 3일로 쉬려고 갔을 때였다. 앞의 이틀은 10년 만의 더위였고, 마지막 날에는 쏟아지듯이 비가 내렸다. 우산을 써도 어떻게 되지 않아서 비에 폭삭 젖은 채 기차를 기다리면서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었다. 꼭 이렇게 끝내야 하니, 라는 기분 반 (소유의 마지막 장면을 읽다가 던지고 싶었던 때와 비슷하게) 뭐 그럭저럭 되었지, 하는 기분 반 정도로. 소유, 애증의 소유 (에필로그 전의 2페이지 정도를 제외하면 사랑한다). 소유는 가을 책이다. 어쨌든, 그래서인지 올해 초여름에 비가 쏟아지자 Savage garden이 생각났다. 단테의 신곡과 함께.
먼저 One step behind 한여름의 살인에 대해서. 이 책의 우리나라 번역 제목은 너무 직설적이라서 좋아하지 않는다. 여름에 일어난 살인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긴 하지. 그런데 한여름은 또 아니란 말이야... 아니 한여름에 일어나는 사건도 있구나. 정정. (그런데 설마 사건이 midsummer day에 일어난다고 한여름이라고 한 건 아니겠지)
수년전 어느 여름방학 때 학교 도서관 서가를 헤매다가 이 책을 집었다. 사실 제목 때문에 펼칠까 말까 망설였다.
해가 거의 지지 않는 스웨덴의 하지 전날 저녁 (midsummer's eve). 20대 초반의 세 아이들이 모여서 야외 파티 준비를 하는 과정이 건조하게 묘사된다 (이 책 - 이라기보다 시리즈 자체의 특징인데 문체가 건조하다). 그 들을 바라보는 한 남자의 시선으로.
작년 10월에 고인이 된 Henning Mankell 헤닝 만켈은 여러 책을 썼는데 (스웨덴 작가이며 일 년의 반 정도는 아프리카에서 보냈다) 그중 Kurt Wallander (우리나라 번역판에는 "쿠르트 발란더"로 되어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스웨덴 사람에게 물어보니 그 발음이 아니었다.) 시리즈가 유명하다. 적어도 미국과 유럽에서는. 우리나라에도 시리즈 중 몇 권이 번역되어 있다. One step behind는 시리즈 중간 정도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게 어째서 번역되었을까 가끔 생각하곤 한다. 나에게 시리즈 중 한 권을 골라라!라고 한다면 (물론) 이 책이긴 하지만 다들 그런 것은 아닐 텐데. 어쨌든, 그 여름에 나는 도서관을 뒤져 발란더 시리즈를 몽땅 찾아 읽었고 (참고로 표지가 인상적이었다), 몇 년 후 외국에 나와 살게 되면서 영어로 번역된 나머지 시리즈를 찾아 읽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나오는 대로 읽었다. 스톡홀름에 갔을 때는 영어책 전문 서점을 찾아가 White lioness를 샀었지(스톡홀름에는 영어로 번역된 스웨덴 작가의 책을 모아놓은 서점이 있다). 마지막 권을 덮으면서 Mankell을 원망했지만 그래도 단편은 간간히 써주기에 기뻤는데 이제는 작가가 고인이 되었다.
쿠르트 발란더 시리즈는, 추리소설의 탈을 쓰고, 뭐라고 해야 할까, 그 당시 스웨덴의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해야 할까. 사건의 배경은 대부분 Ystad (스웨덴 남쪽의 작은 도시)이고, 쿠르트 발란더는 그 도시의 형사다. 어째서 이런 소도시에 이런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싶기는 한데, 소설에는 그에 대한 언급도 나온다. 시리즈에 고정적으로 나오는 인물들은 발란더와 동료 형사들, 그 주변 사람들 정도이고 책마다 사건과 관련된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어쨌거나, 이 시리즈는, 재미있다.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아주 재미있다. 그리고 그 재미의 거의 60%는 쿠르트 발란더라는 캐릭터에 기대고 있다.
쿠르트 발란더는 대단히 유능하다. 탐정의 유능함이 아니라 형사로서. 물론 감이 좋기는 하지만 그 보다는, 사건과 그에 따라오는 온갖 잡다한 일을 잘 관리하고 전체를 제대로 본다. 이런 과정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따라가며 읽는 게 즐겁다.
하지만 이 사람의 진정한 매력은 다른 곳에 있다. 이 사람은,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안쓰럽다.
이 책에서는 더더욱 안쓰럽다. 뭐랄까 안쓰러움이 쌓이고 쌓여서 경지에 오른 것이다. 몇 년간 사귀던 애인은 결혼 못하겠다고 선언했고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리가의 개에서 자세히 나온다), 나이는 들고 살이 찌고 급기야 덜컥 당뇨가 오고, 내가 왜 경찰 따위가 되었나를 하루에 몇 번씩 되새기게 되는 사건은 계속 일어나고, 젊은 검사 놈이 기어오르고, 이혼한 (하지만 잊지 못하는) 아내는 재혼하겠다고 연락이 오고... 정말로 현실적으로 안됐다 싶지 않은가.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몇 시간 씩 운전해서 피해자 후보를 찾아다니는 장면을 읽다 보면 토닥거려주고 싶어 질 정도. 참고로 저 "당뇨병" 설정은... Mankell이 의사 친구에게 "이런 이런 식생활 습관을 가진 이 나이 남자가 걸릴 만한 병이 뭐가 있냐" 물었더니 당뇨병이라고 바로 대답이 왔다고.
그나저나 나는 왜 이 책을 특히 좋아할까. The dogs of Riga는 멋진 첩보물이다. Faceless killers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묻어 나오는 두려움 덕분에 나는 지금도 가끔 느닷없이 무서워져서 문이 잘 잠겼나 확인하기도 하고, 작은 버릇도 하나 생겼다 (특정 상황이 있는데, 그걸 말하면 스포일러가 되어서. 살인의 계기가 되는 상황이 지나치게 그럴듯해서 정말 무서웠다). 음, The fifth women는 여성의 분노를 보여주고... 그러니까, 내 말은, 이 시리즈에는 이 책 아니어도 많다는 거다.
이 책이 제대로 미친놈에 대한 이야기라서 그런 걸까. 그런데도 이런 미친놈! 하고 밀어내 버리기도 뭣한, 그런 애가 범인이라서? 살해당한 사람들이 안타까워서? (살인의 이유가 이유이니 만큼...) 배경이 되는 여름의 묘사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웨덴의 여름은 각별하니까. 처음 스웨덴에 갔을 때가 5월 중순쯤 이었는데, 이미 그때에도 새벽 2-3시까지 환해서 (옅은 빛이 스며드는 느낌으로) 꽤나 들떴었다. 그곳에 방문했을 뿐인 내가 그런 기분이었으니 그곳에 살면서 겨울을 보낸 사람들은 여름이되니 어찌나 에너지를 뿜어내는지.
또 다른 이야기인데, 발란더 시리즈 마지막권을 덮고 나는 Mankell! 꼭 이래야겠냐! 또 니 의사 친구가 얘 같은 사람은 이렇게 되는 거다 라고 하더냐!!!라고 속으로 외쳤다. 너무 하지 않습니까,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