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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j Oct 09. 2016

아가사 크리스티, 메밀국수

Agatha Christie 1 : The Hollow

강판에 간 무즙이 먹고 싶다. 가끔 발작처럼 생각했다. 나메코오로시도 먹고 싶다. 점점 꿈이 부풀었다. 순무와 낫토를 섞어서 교토의 시치미를 뿌려 먹고 싶다. 꿈이 망상의 지경에 이르기 시작했다. 냄새가 나지 않는 따뜻한 밥에 유부 된장국. 아아, 메밀국수메밀국수메밀국수...... . 드디어 알프스 산을 그리워하는 하이디처럼 병이 들었다.
 - p. 73, 나의 핀란드여행, 가타기리 하이리 


나는 거의 모든 것을 글로 배워왔다. 학교 수업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우선은 글로 배웠다. 뜨개질도 글로 배웠었지. 영어에 익숙해지는 방법으로 택한 것도 우선은 많이 읽고 보자, 는 것이었다. 처음 미국에 도착해서, 뭘 읽어야 영어에 익숙해지는데 도움이 될까 하다 선택한 것이 아가사 크리스티였다. 이것도 글로 배웠다 - 시오노 나나미 수필에서 그녀가 이탈리아어를 공부할 때 잡지와 추리소설을 읽었다고 했던 것이 생각나서.  


번역된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을 읽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었는데, 웬걸, 원서로 읽으면서 나는 크리스티 여사의 팬이 되어버렸다. 크리스티 여사의 (영어) 문장은 읽기가 쉽다. 단어를 자주 찾아볼 필요도 별로 없다.  추리소설이라고는 하지만 트릭이나 사건의 전개보다 사람의 관계에 집중한다. 어릴 때는 그게 불만이었는데 나이 들고 보니 그게 매력 요인으로 다가온 것이다. 


...... 크리스티의 공포는 그런 것이 아니다. 원래 크리스티라는 사람은 심리묘사도, 풍경 묘사도 거의 하지 않는 작가다. '여성적인 감각'을 내세우지도 않고, 문장도 짤막하고 간단하다. 그런데도 마음속 저 밑바닥까지 오싹하게 한다. 

 - p. 162, 이즈모 야상곡 (삼월은 붉은 구렁을), 온다 리쿠


심리와 풍경 묘사를 거의 하지 않는다는 쪽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짤막하고 간단한 문장으로 오싹함을 끌어낸다' 에는 찬성한다. 삼월 시리즈 이후에는 질렸어,라고 생각하면서도 온다 리쿠 신작을 가끔씩 체크해 보는 이유가 이 작가의 이런 면 - 다른 책이나 작가에 대한 공감 - 때문이다. 


아. 그래서 메밀국수. 요네하라 마리도 가타기리 하이리도 외국생활을 하다가 가장 생각나는 음식으로 메밀국수를 꼽았다. 그 메밀국수에 대응되는 것이 나에게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이다. 세상 모든 것이 다 귀찮은데, 심지어  잠들기도 어려울 때 찾게 되는 것이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 - 그녀가 만들어낸 작은 세상 - 이다. 미스 마플 시리즈는 장편/단편다 읽고 (심지어 여러 번) 예전 BBC 드라마 판까지 다 봤지만 푸와로 쪽은 아직 해치우지 않은 것이 남아서 요즘은 푸와로가 등장하는 책중에 하나둘씩 골라 읽고 있다. 어제(금요일) 오후부터 뇌가 파업을 선언하고자 하는 기미가 슬슬 보여, 아마존에서 The Hollow를 구입하여 달랬다. Kindle이란 참 좋은 것이다. 


(이 아래부터는 The Hollow의 내용이 나옵니다) 


크리스티 여사의 등장인물 소개는 마치 덫을 준비하는 것 같다. 짤막하게 그 캐릭터의 본질을 슬쩍 내비치는 기술이 정말 훌륭하지 않은가. The Hollow에서는 크리스티 여사의 소설에 꽤 나오는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가 먼저 등장한다 - Lucy = Lady Angkatell. Lucy는 그야말로, 뭐랄까, 소설에서도 그렇게 이야기 하지만 요정 같은 사람이다. 생각의 흐름이 여기저기로 튀고 그걸 아무 맥락 없이 툭툭 말하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당혹스럽다. 생각의 속도가 느리며 하나를 걱정하기 시작하면 그 안에서 뱅뱅도는 Gerda = Mrs. Christow 에게는 최악의 대화 상대일 것이다. 


Lucy의 '요정스러움'은 딱히 악의를 가지지 않고 그저 자기 기준과 생각대로 행동하고 말한다, 는 점에 있겠다. 새벽 6시 13분에 깨어나서 생각난 것 (주말에 초대한 손님들에 대한 걱정)을 의논하기 위해 그 전날 도착한 사촌(Midge) 의 방에 쳐들어가는 도입부는 그야말로 흥미진진하다. (저 Midge란 이름이... 저거 일종의 파리 같은 거였는데...? 저게 본명이란 말인가.) 게다가 그 후에 주전자로 물을 끓이고 (Midge가 다시 일어나면 차를 마시고 싶을거야 하며), 그 사실을 바로 잊더니 자기 방에 가서 평화롭게 잠들어버린다. 집사와 하녀들이 한숨을 쉬며 주전자를 교체하는 (이 집에는 이런 상황을 무마시키기 위해 여섯 개의 주전자가 준비되어 있다) 장면까지 가면 큭큭거리며 크리스티 여사가 만들어가는 이 세팅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나에게 가장 흥미로운 사람은 Lucy였다. 이런 사람 실제로 있는가 하면, 있긴 있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Sir Henry shook his head. 'Lucy, ' he said, 'doesn't realise that there are things that she can't do.' Midge stared. He went on: 

'She gets away with things. She always has.' He smiled. 'She's flouted the traditions of Government House - she's played merry hell with precedence at dinner parties 

......

That tricks of hers - smiling at people and looking as though she couldn't help it! Servants are the same - she gives them any amounts of trouble and they adore her.'

'I know what you mean, ' said Midge thoughtfully. 'Things that you wouldn't stand from anyone else, you feel are all right if Lucy does them. What is it, I wonder? Charm? Magnetism?' 

- The Hollow, Agatha Christie.

사실 진짜 궁금한 건, 누구(어쩌면 여러 명?) 에게서 크리스티 여사가 이 캐릭터를 본걸까, 라는 것이지만.  


추리소설을 읽을 때는 범인이 누구인가를 궁금해하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크리스티 여사의 소설을 읽을 때는 (The body in the library 같은 것은 빼고) 누가 죽을까가 궁금해진다. 범인은 감으로 맞추는 거다. Lucy의 평화로운 등장에 이어 The Hollow (저택 이름이다... 대체 왜 싶은 이름 하나 더 추가)의 주인인 Henry/Lucy Angkatell, 그리고 주말에 초대받은 손님들이 하나하나 묘사된다 : Midge, Henrietta, Edward - 나이차가 나는 '사촌들', 더 어린 (이제 대학생인) '사촌' David, Angkatell 집안이 아닌 손님인 John/Gerda Christow - 잘 나가는 매력적인 의사선생과 그야말로 매력 없다는 그 부인 (=poor Gerda!), 그리고 푸와로.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등장하는 John의 옛 연인이었던 배우 Veronica Cray까지. 그 사이의 관계는, 요약하자면 


Midge -> Edward -> Henrietta <-> John <- Veronica, Gerda

                                                            

인데, 꽤 질척거릴 것 같은데 Midge, Edward, Henrietta 의 성격, Gerda의 John에 대한 눈먼 숭배 덕분에 의외로 산뜻하다. Veronica는 좀 다른데, 그래도 이 쪽은 자기애가 강한 만큼 덜 위험하다. 오히려 무서운 것은 Gerda. 살아있는 사람을 우상화해서 자신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만큼 위험한 것은 드물지 않을까. Edward는 첫사랑의 환상과 그 자신의 성격이 결합한 정도고, Midge가 구원해주어서 다행이었지만. 



삶과 죽음에 관한 이 소설의 태도도 좋았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고, 죽는 순간까지 "살아있음"이 느껴지는 사람이 죽어버리고,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It wasn't the circumstances of life they enjoyed, it was life itself - the zest of existence.  

- The Hollow, Agatha Christ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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