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맨하탄의 서점 1
카톡으로 사촌동생이 사진을 하나 보내왔다. 매그놀리아 베이커리의 바나나 푸딩. 대구에도 들어왔다고. 20대를 보낸 곳은 평생 남는다고 누가 그랬었다. 내 20대는 두 도시로 나누어지는데 후반부는 뉴욕이다. 5년을 살았는데, 처음 1년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영어에 적응하느라 너무 힘을 쏟은 탓이리라.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을 시립도서관에서 빌려 잔뜩 읽었고, 자주 가던 동네서점에서 발견한 The Thirteenth Tale (Diane Setterfield)를 읽으며 겨울밤을 보냈던 기억만 잠기듯이 남았다. 집에서 나오면 멀리 보였던 Cathedral of St John the Divine이 매일 아침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그런 묵직한 건물을 보면 왠지 마음이 편하다). 아, 그 이후에는 꽤 즐겁게 그리고 열심히(나름) 살았다. 마지막 1년은 다시 힘들었지만 - 졸업논문 썼다 -_-
뉴욕, 이라기보다는, 맨하탄은 희한한 곳이었다. 분명 "대"도시인데 동네 같은. 작은 섬안에 정말 뭘 그렇게 몽땅 집어넣으려고 애를 쓰는 걸까 싶을 정도로 복작복작하게 많은 것들이 들어와 있는.
바나나 푸딩 사진을 보니 몇 장면이 말 그대로 파도처럼 밀려왔다. 맨하탄 북쪽 - 110가 근처 - 에서 살았던 나는 생각을 정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무작정 걷곤 했다. 맨하탄은 의외로(?) 꽤 걷기 좋은 동네다. 워낙 테러 위협에 시달리다 보니 거리마다 경찰이 깔려있어서 오히려 안전해졌다 랄까. 큰길을 따라서 주변 풍경이 휙휙 바뀌는 걸 스치며 걸었었다. 그러다 보면 콜럼버스 서클을 지나고, 타임스퀘어까지 갈 때도 있었다. 매그놀리아는 49가쯤 있어서 지나가다가 사람이 별로 없으면 가끔 레드 벨벳 컵케이크나 바나나 푸딩을 샀다.
(아주 옛날 사진)
The Thirteenth Tale을 산 서점은 그때 살던 집에서 3분 거리에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그 서점 앞을 지나면 어쩐지 오늘도 세상이 그럭저럭 돌아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출/퇴근길에 서점을 지나가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들어가지 않더라도 그냥 책이 진열된 것을 지나가면서 구경만 해도 기분이 한결 좋아지니까.) 꽤 자주 들어가서 서가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The Thirteenth Tale은 가판대 - 싸게 파는 책들을 늘어놓았다 - 에서 구했다. 추리/범죄소설 서가를 둘러보다가 One step behind를 샀었다. 나중에 킨들 버전으로도 샀지만 (6월쯤 되면 매년 읽고 싶어 져서) 버릴 수가 없다. 체스 입문서도 하나 샀었던가. 주말에 방에서 늘어져 있다가 가끔 나가서 둘러보기도 했다. 그리 크지 않은 - 맨하탄에 넓은 가게가 어딨겠냐마는 - 서점이었고, 주인이 딱히 친절하다거나 하지도 않았는데 이 서점에 들어서면 그냥 마음이 좀 놓였다. 내가 처음으로 정을 붙인 장소여서 일지도. 그 후에도 어디로 이사를 가든 동네 서점부터 우선 찾고 본다.
논문을 마무리 지을 때쯤 이 서점이 문을 닫았다. 그때 알았는데 꽤 긴 역사를 가진 서점이었나 보다. 어쨌든, 너무너무 슬펐는데 나만 슬퍼한 게 아니었던지, 동네의 다른 큰 서점이 이 서점을 인수해서 분점으로 (본점이 5분 거리에 있는!) 삼았다. 본점은 인문학 쪽 책(+대학교재)이 많은 곳이었는데 이쪽은 원래 컨셉대로 유지하면서. 세상이 끝나지는 않는구나 했었다.
맨하탄에는 크고 작은 서점이 잔뜩 있어서 그냥 걷다가 발견해서 들어가고는 했다. 집 근처의 서점을 가장 사랑했지만, 가끔 멀리 나오면 - 소호 라던가 - 그 지역 서점을 여러 군데 둘어봤었다.
Bryant Park는 건물과 자동차에 시달린 눈을 잠시 쉬게 해 주는 귀중한 곳이다. 그 맞은편의 Kinokuniya(일본 체인 서점)에도 자주 갔었다. 일본어는 잘 읽지 못하지만 - 그래도 자수나 뜨개 책을 둘러보다가 한 권씩 사 오곤 했다 - 여기 2층의 카페에서 일본식 케이크나 푸딩을 사서 Bryant park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 책을 읽을 수 있으니까. 가끔은 카페의 큰 테이블에 앉아서 공부를 한 적도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계속 바뀌어서 구경하는 즐거움도 있었으니까.
맨하탄만큼 길 찾기가 쉬운 곳도 없다고들 하지만 그건 순전히 소호 윗부분에나 해당되는 말이다. 무질서한 다각형 플레이스 단위로 조각조각 쪼개진 소호는 여행자들이 길을 잃게 하기 위해 음흉하게 계획된 곳이다. 제딴엔 이 곳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으스대고 걷다가 곧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이곳에 살았던 때라면 그런 것 가지고 별 걱정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복잡한 곳이라도 자주 드나들면 무의식 속에 정보가 쌓여 그것들이 나침반 역활을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그 정보들은 폐기처분된 지 오래였다. 나는 정체불명의 낡은 벽돌 건물과 불법주차된 볼보차 사이에 서서 911에 구조요청을 해야 할지 아니면 머리핀을 뽑아 콤팩트로 두들겨 임시 나침반을 만들어야 할지를 두고 고민했다.
- 면세구역 (듀나)
소호, 그 남쪽은 처음에는 정말 가기 싫은 곳이었다. 그 근처에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갈 일이 있었는데 워낙에 길이 얽혀 있어서 어떤 길이든 반대방향으로 가버리는 나 같은 사람에겐 이런 짜증 나는 곳이 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1년, 2년이 지나면서 그 괴상하게 뻗은 골목들이 익숙해졌다. 여전히 헤매었지만 빠져나갈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달까. 큰길은 사람이 워낙 많으니 나중에는 일부러 골목길로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찾은 McNally Jackson은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던 서점이다. 런던에 와서 London Review Bookshop에 처음 갔을 때 굉장히 익숙한 기분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 두 서점이 좀 닮았다. 좁은 계단으로 내려가면 약간 어둡지만 그리운 느낌의 지하 서가가 나오는 것, 그리고 서점 안의 카페 같은 것이? MJ가 물론 훨씬 밝은 느낌이었지만. 소호에 갔다가 이 서점에 들어와서 마음 가는 데로 서가를 돌아다니며 구석에 있는 의자를 차지하고 책을 보곤 했었다. The Little Stranger (Sarah Waters)를 아마 여기서 샀던가. 시간이 좀 많은 날에는 서점 카페에서 점심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면서 공부를 하거나 사람 구경을 하기도 했다.
(다른 서점 이야기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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