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gs & Reels (by Joanne Harris)
지쳤다. 자잘한 실수가 모여서 결국 좀 귀찮은 일을 두 번하게 생겼다 (결국 세 번 했다).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면 서점에, 안 가 봤던 서점에 가야 한다. 구글맵에서 현 위치에서 갈만하며, 안 가 봤으나 좋아 보이는 서점을 (절박하게) 찾아봤다. 이전에 표시해 뒀던 Camden Lock Books가 잡혔다.
서점은 Camden역 안(?)에 있다. 입구에서부터 막 쌓인 책들에 두근두근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이런 거야. 여기저기 흩어져 있지만 어떤 질서가 있는 서가. Mark Forsyth가 말하던 멋진 unknown unknown을 만날 것 같은. 서점 자체는 크지 않지만 둘러보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러다가 시야 한구석에 뭔가 빨간 것이 잡혔다. 빨간 하이힐...?
Joanne Harris.
나이가 들면서 소설을 읽는 것이 감정적으로 힘들어지고 있다. 삶은 대부분 고단하거나 고단함을 피하기 위한 노력의 연속이며, 재미있는 소설은 그 고단함을 잘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푹 빠져서 읽다가 지쳐버린다. 덕분에 요즘은 논픽션, 소설이라면 이미 상황과 결론을 대부분 알고 있어서 마음의 준비가 가능한 책(=역사소설, 이미 읽은 책) 이라던가 (피해자에게 깊게 공감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의) 추리소설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피난처로 "믿을 수 있는 작가"들의 책이 있다. 견딜 수 있는 정도의 고단함과 카타르시스가 보장된. Joanne Harris는 "사이다"를 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와 맺어져 있다. [초콜릿] 같은 경우는 심지어 고단함조차 크게 주지 않으며 [Sleep, Pale sister]는 괴로워할 만한 소재인데 가뿐하게 읽었다.
그리니 이런 날 이런 책을 발견하니 기대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것 같다. 넘겨 보니 심지어 단편집. 처음 나오는 제목이 Faith and Hope go shopping. 요양원의 할머니들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 휠체어를 타야 하는 Faith는 잡지에서 본 새빨간 하이힐을, 눈이 보이지 않는 Hope는 롤리타 - 아르바이트하러 온 대학생이 "부적절하다"며 도서관에서 대출해 주지 않음(‘One of the greatest writers of the twentieth century, and you thought he wouldn’t suit us!’) - 를 꿈꾼다. Joanne Harris의 책이니 음식은 당연히 등장한다. "씹지 않아도 되는", 라이스 푸딩이나 포리지가 아닌 음식의 나열이라던가 (God forbid our remaining taste buds should be overstimulated). 거의 첩보전에 가까운 계획을 세워 요양원을 잠시 탈출한 두 사람은 Fortnum and Mason에서 점심을 먹으며 황홀해한다. 묘사며 장면 곳곳이 유쾌하다.
'Hurry! She'll be back any moment!'
'Shh', Beep-beep-beep-beep. 'Got it. I knew one day I'd find a use of for those music lessons they gave me as a child' The door slid open. We crunched out onto sunlit gravel.
- Faith and Hope go shopping, p.19
늙어가는 일과 작고 사소한 사치. 이 단편집에는 그런 이야기가 Hope & Faith 외에도 몇 개가 있다. 그리고 보니 [오렌지 다섯 조각]에도 그런 이야기가 깔려있었다.
외출이며 여행을 좋아하시던 할머니는 나이가 들면서 `나 많은 사람이 밖에 다니면 흉하다' 하시며 집에만 계속 계셨다. 그리고는 나에게 사치를 부리라고,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곳, 입고 싶은 것을 다 해보라 하셨다. 그때는 그런가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께서 하고 싶은 것들을 말씀하셨던 게 아닌가 싶다.
읽으면서 내내 콕콕 생각나던 Tove Jansson의 The summer book을 집에 와서 다시 꺼냈다. 할머니와 작은 손녀의, 여름의 핀란드 작은 섬 이야기. 그리고 배경에 슬며시 흩어진 죽음에 대한 이야기. 언젠가 Daunt Books를 돌아다니다가 파란 표지에 끌려서 집어 든 이 책은 내가 Tove Jansson이 만든 이야기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 되었다. 예를 들어 할머니와 작은 손녀의 이런 대화
"When are you going to die?" the Child asked.
And Grandmother answered, "Soon. But that is not the least concern of yours."
"Why?" her grandchild asked.
- p.22
처음 읽었을 때는 뜬금없이 언제 죽을 거냐니...? 싶었는데 나중에야 저 툭 튀어나온 물음에서 배어 나오는 아이의 불안함을 알 수 있었다.
시작은 Joanne Harris 소설의 유쾌함과 반짝임과 그 무엇이었는데 Tove Jansson으로 넘어왔다. 그러고 보면 Faith&Hope는 작가가 요양원의 자기 할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여름책은 작가의 어머니와 조카로부터 엮어져 나왔다.
찾아보니 온라인으로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