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아를 냉동한 뒤 생긴, 이상한 자신감

by 아가 대장군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었다. 회사도 그대로였고, 몸은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고, 앞으로의 일은 여전히 불확실했다.

그런데도 조금 덜 쫓기는 기분이 들었다. 왜 그런지 오래 생각하지는 않았다. 냉동된 나의 배아들 덕분에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이 은근하게 계속 느껴졌던 것 같다. 자신감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런 감정들이 기분 좋게 느껴지는 종류는 전혀 아니었다. 그래서 정말 이상했던 것 같다.


나는 원래 이렇게까지 준비해 두고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하고 싶으면 했고, 싫으면 안 했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내 미래를 잠깐 보관해 두고 나서야 앞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인생이 점점 관리 가능한 단위로 쪼개지는 느낌이었다.




퇴근길. 나의 작고 소중했던 신혼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집이 가까워 올 수록 항상 가벼운 긴장감이 들었다. 종종 주변을 천천히 봤다. 골목은 어둡고, 중간중간 모텔 간판이 켜져 있었고, 인도가 끊긴 길에서는 차와 오토바이를 피해 걸어야 했다. 가끔은 취객들이 비틀거리며 지나갔다.

그 풍경이 늘 불쾌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지금 내가 있는 위치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걸 매일 통과해서 집에 들어갔다. 작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겨우 마련한 집. 그 집은 소중했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더 선명했던 것 같다.



난자(배아)를 얼린 직업여성은 드디어 이직 준비를 시작했다. 자기소개서를 계속 다시 썼다. 몇 줄 고치고, 다시 지우고, 또 고쳤다. 이번에는 점점 내 이야기가 조금 더 또렷하게 보였다. 그 이야기 속의 나는 생각보다 많은 일을 했고, 생각보다 오래 버텼고,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었다.

면접 준비도 했다. 혼자 중얼거리듯 연습하다가 가끔은 남편과도 걸어 다니면서 면접 역할극을 했다.
“이런 문장을 진짜 내가 말한다고?”
몇 번 반복하니까 조금 그럴듯해졌다.

출처 : 아시아경제(인사담당자가 꼽은 면접 비호감 6위)




회사에서는 더 바쁘게 움직였다. 혹시라도 갑자기 나가게 되면 뒤에서 욕먹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일을 더 많이 했다. 출장이 잡히면 먼저 손을 들었고, 굳이 안 가도 되는 일정에도 끼어들었다. 청장님을 모시고 가는 일정도 있었고, 무기 수출 계약을 협상하러 가는 출장도 있었다.


회의실에서 협상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진짜 내 일이 될 수도 있겠구나. 그때마다 조금 많이 두근거렸다. 사실 아기를 가진 사람의 마음을 몰랐던 때라, 아기를 준비하는 마음보다 더 두근거렸던 것 같기도 하다.


이 시기에 나는 꽤 신나 있었다. 임신을 잠시 미뤄도 된다는 생각이 들자 미래가 갑자기 넓어진 것 같았다. 그동안은 항상 언제 멈춰야 하는지를 먼저 생각했는데, 그 기준이 사라지니까 속도가 붙었다. 나는 더 가보고 싶어졌다. 다른 나라에서 협상하고, 계약 이야기를 하고, 그 안에 내가 서 있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게 생각보다 생생했다.


+ 그리고 아주 솔직하게 말하면, 서울 중심 한복판의 좋은 아파트에 살고 싶었다. 이름만 들어도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 그런 곳. 단정한 외벽, 정리된 조경, 밤에도 밝은 길. 퇴근하고 집에 들어갈 때 주변을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 이직을 해서 성공적인 커리어로 발전시킨다면 그게 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서 좋았다. 이런 발전적인 미래에 대한 두근거림은, 배아를 얼려 두었던 덕분에 느끼게 된 것이었다. 감사했다.

살고 싶다...


이직을 하고 나서도 나는 자주 냉동배아 얘기를 했다. 이것이 주는 안정감이 정말 컸나 보다. 특히, 미혼인 동료들에게는 밥을 먹다가도 자연스럽게 난자 냉동 얘기를 꺼냈다 (미혼이면 난자만 냉동 가능). 내가 가졌던 안심이 되는 기분을 내 동료 여성들도 느꼈으면 했다.

“혹시 아기 생각 있으시면… 미리 난자 냉동하는 것도 한번 고민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게 꼭 필요한가요? 무서운데...”
“꼭이라기보다는… 마음이 정말 편해지더라구요.”

사실 배아를 냉동했다고 해서 내 인생이 안정된 건 아니었고, 그냥 조금 덜 불안해지는 방식에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그걸 자신감이라고 불렀다. 정확히는, 조금 늦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

돌이켜보면 그건 자신감이라기보다는 조금 덜 무너질 것 같다는 애쓰는 마음과 더 비슷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마음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한 발짝도 못 움직였을 것이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