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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 May 30. 2024

[Review] 슬픔의 다정한 면면

도서 <슬픔에 이름 붙이기>

우리는 살아가며 다양한 감정을 마주한다. 명확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닌 경우도 존재한다. 환희와 비애가 뒤섞이기도, 열락과 상실이 합쳐지기도 한 감정 구슬들이 머릿속을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나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가, 짙은 암흑 속 너저분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다 이내 낙하한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은 자유롭지만 어딘가 축축한 진흙 더미 속에 파묻힌 것도 같다.      



도서 제목인 '슬픔에 이름 붙이기'는 불완전한 언어의 빈틈을 메우고 싶다는 생각을 실천으로 옮긴 저자 존 케닉의 프로젝트 이름이기도 하다. 그는 누구나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일 때가 있으며 그것에 이름을 붙이지 못하면 외로움과 공허함이 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올해 들어 일기를 쓰는 습관을 붙이고 있는데, 펜으로 글씨를 써내려가자면 지나가는 생각들에 이름을 붙여주고픈 열망이 샘솟을 때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단어가 우리에게 그토록 완전히 실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닌데,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기를 정말 절실히 원하기 때문이다. 삶이 혼란스럽고 불확실하게 느껴지고 모든 게 뒤섞일 때마다, 단어는 우리에게 이것과 저것을 구분해주는 분명한 선들로 명료함과 선명함의 감각을 제공한다.

 당신은 당신이 누구이며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모를 수 있지만, 적어도 '마그마'와 '용암', '해협'과 '피오로드', '개똥지빠귀'와 '때까치'의 차이는 알 수 있다. 그저 어떤 것을 단어로 일컫는 행위만으로도 당신은 모든 게 통제되고 있다는 인상을 얻게 된다." - 293p          



아노사이티아 ANOSCETIA      


'진짜' 자신을 알지 못한다는 불안감을 뜻하는 말이다. 주변 사람들은 뭘 해도 대단해 보이고 선명한 색을 가진 것 같은데 나만 제자리인 것 같을 때가 있다. SNS를 보면 이러한 상념이 더욱 머릿속 깊이 파고든다. 


나쁜 것보다 좋은 것만 골라 올리는 개인 미디어의 특성을 알고 있음에도 왠지 모를 허탈함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내가 이 세상에서 지워지는 느낌. 나 하나쯤 없어도 끄덕없을 것 같은 사회를 바라보며 쓸쓸함을 느낀다.      


하지만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엮어 게시물이나 스토리로 올릴 때면 찰나의 반짝임을 본다. 나만의 사진첩을 꾸미는 재미는 쏠쏠하다. 귀여운 반응들은 나를 잠깐 저 하늘로 데려갔다 온다. 사진을 찍고 짤막한 글을 쓰고 불특정 다수에게 보이는 이 행위가 '나'를 만들어 가는 것만 같다.      


"어쩌면 단일한 자아라고 부를만한 건 없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은 저마다 진짜인 여러 페르소나로 만든 유동적인 콜라주인지도 모른다. 주변 세상의 수많은 작은 인상들을 반영하는 서로 다른 기분들과 활기찬 우연들로 반짝이는, 영원히 움직이는-하지만 전반적으로 큰 패턴은 없는-문양들의 만화경." - 94p          



그노시엔느 GNOSSENNE      


여러 해 동안 알아온 누군가에게도 개인적이고 신비한 내적 삶이 존재한다는 깨달음을 뜻하는 단어이다.이 구절을 읽자마자 올해 초에 기고했던 12년지기와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수많은 세월을 알아왔음에도 채우지 못한 여백이 이토록 많았던가. 


이 친구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내가 조금은 부끄러워지는 순간을 마주한다. 일련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그의 삶의 굴곡에 대해 생각한다. 그 속에서 나와 함께했던 기억은 언제인지 매만져본다. 흐렸던 기억은 생생한 화질로 되돌아오고 천진난만했던 그 때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렴풋이 웃어본다.      


"중요한 것은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신비를 헤쳐 나가며 던지는 질문이라는 행위, 틈을 건너가려는 노력의 행위다-그것이야말로 매달릴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계속 살아 있게 해야 할 감정이다. 설령 우리가 그 감정을 표현할 적확한 표현을 절대 찾아내지 못한다 하더라도."-137, 138p          



평소에 내가 하는 생각들을 그대로 풀어놓은 것 같은 책 속 짧은 산문은 내게 묘한 안도감과 뜻모를 위로를 주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페이지들도 더러 있었다. 담담한 언어로 감동을 선사하는 저자의 문체가 선연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덕분에 머리맡에 두고 잘 책이 한 권 늘었다.


원문 링크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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