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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유 Mar 04. 2021

오늘 퇴사를 했고 면접을 봤고 그 사이에 커피를 마셨어

ㅡ.소소(小笑)글

  코로나 시대라는 대환장 시국에 퇴사를 했다. 이전해에도 코로나로 인해 6개월을 무급으로 휴원을 하여 통장은 돈보다 내 한숨이 차지하는 양이 더 많은 상태였다. 이번 기회에 아예 업종을 바꿀 생각에, 또 처음으로 오래 백수로 지내보자는 생각에, 여기저기 이력서만 찔러넣고는 마음을 내려놓고 있었다.

  가물가물했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되짚어 취업 사이트에 들어가 이력서 수정 버튼을 눌렀다. 내 이력서의 마지막 수정날짜는 2016년이었다. 그 숫자를 본 순간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동안 그렇게 수십, 수백 번,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하고, 징징거렸는데, 정작 손가락 몇 번 움직여서 이력서 몇 줄 고치지도 않았구나, 나 역시 참 게으르구나, 안주하다 못해 퍼질러앉아 살았었구나, 싶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이력서를 넣은 다음 날 그 주의 금요일에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금요일은 나의 퇴사날이었다. 서운함에 울고불고 하는 학생들과 강사 교체가 영 못마땅해 소요스러운 학생들과 이별하느라, 마지막까지 해결 안 난 분반(分班)문제로 실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진을 쏙 빼고, 그 과정에서 나의 고질병인 긴장성 두통과 승모근 근육통을 이고서 면접장소로 갔다.

  40대 중반의 멋진 여자 원장님이셨고, 조금씩 기운이 빠져가면서도 면접이란 긴장감이 들지 않을 정도로 편하고 즐겁게 이야기가 오갔다. 그런데 거의 마지막 질문에서 나는 말문이 막혔다.

  "10년 뒤에는 무엇이 되어 있을 것 같아요?"

  머릿속이 멍했다. 글쎄요. 차마 입밖으로 내밀진 못했지만 내 입안에는 이 세 글자가 불어난 토사물처럼 꽉 물려 있었다. 10년 전에도 나는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고, 그 때 내 대답은 "작가가 되어 있을 거예요."였다. 또 그 이전 10년 전에도 나는 이런 질문을 받았었고, 그 때의 내 대답은 "배우가 되고 싶어"였다. 그런데 10년, 아니 도합 20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나는 무엇이 되어 있지? 이렇다할 작가도 되어 있지도 못하고, 글쓴답시고 경제적 기반도 부실한, 33살 예비 백수 여자 아닌가. 그것도 여전히 방황하고 기로에 서 있는 채로 말이다. 글을 계속 쓸까, 말까. 일을 그만 두고 글만 써볼까. 아니야, 그냥 글은 포기하고 돈이나 벌자. 그래, 야근이나 잔무가 없는 일을 하면서 글을 쓰자, 물론 그런 일은 급여가 적겠지만.

  그렇게 어느 하나도 내려놓지 못하고 지지부진 어영부영 시간이 흘러 오늘의 내가 있다. 오늘은 일을 해서 피곤하니까, 눈꺼풀조차 못 들 정도로 우울하니까, 주말 동안 잠 줄이고 밖에 안 나가고 몰아서 써보지 뭐. 이런 식으로 재능도 없는게 노력도 안 하면서 나 자신에게 계속 면책권과 면죄부를 줬다. 한심할 정도로 의지가 박약하다, 벌써부터 인생 조진 조짐이 보인다. 이렇게 나 자신을 원망하고 학대했다. 셀프로 병 주고 약 주고,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한 거다. 그 오랜 세월 동안. 특히 순수문학과 시나리오라는 글쓰기의 특성이 사람의 기력을 쑥 빨아먹는 건데, 거기에 간헐적으로 급발진하는 시도에, 거듭되는 실패를 반복하니, 나는 정말로 한 10년은 문지르고 삶고 빨아대 너덜너덜해진 걸레짝 같은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대답을 뭐라 했냐고?

  교무실과 상담실에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나와 면접을 보러 가기 전 한 시간 정도가 남았다. 그 사이에 나는 윤 선생님과 커피를 마셨다. 약 6년간 일하면서 처음이었다. 그 분은 새벽 반을 가르치시고, 나는 주간(晝間)/야간 반을 가르쳐서, 딱 맞아떨어지는 시간대는 없으나, 그래도 애써보면 한번쯤은 시간을 만들 수도 있었을 거다.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처음으로 커피를 한 잔씩 놓고 마주 앉았다. 그 분이 커피를 사주셨다. 나는 평소 나답지 않게 말이 많아졌다.

  "전부터 선생님께서 글을 쓰신다고 들었는데 어떤 글을 쓰셨나요?"

  "지금도 쓰시나요?"

  "혼자 사는 건 어떤가요?"

  "전 사실 열두 살 때부터 혼자 살고 싶었는데 어쭙잖게 글 쓴다고 돈도 넉넉히 못 모아놨어요, 하하하."

  "사실 저 무슨 일 할 지도 안 정해놓고 그만 둔 거예요, 아하하하하."

  많은 이야기가 쏜살같이 오갔다. 조언과 격려와 뒷담과 인생사와 진심과 농담들이. 한숨과 웃음이. 그중 다음 몇 가지는 그 다음날까지 머릿속에 도장을 찍은 것처럼 명징하게 남는다.

  "나는 내가 해볼 만큼 해봤다 생각해. 그래서 이제 미련은 없어. 결국 못 이뤘지만 그래도 나는, 했.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랐고 오랫동안 애썼던 여자가 자신을 다독거리며, 자신과 비슷한 궤도를 걷고 있는 12살 어린 여자의 앞날을 빌어주는, 그 아름다운 얼굴과 목소리를 나는 왠지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다.

                                                             .

  그날 "십 년 뒤에는 무엇이 되어 있을 것 같아요?" 라는 질문에 나는 수줍게 웃으며 "선생님이요." 라고 초등학교 3학년처럼 말했다. 그러나 실은 입안으로 '글쎄요'라는 단어를 물고 있는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아담한 집에 혼자 나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내 모습을 떠올렸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씻고 가져온 짐들을 정리하면서도 나는 면접 때 머릿속에 펼쳐졌던 10년 후 바라는 나의 모습과 그 순간 든 당황스러운 감정에 내내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불을 끄고 언제나처럼 두세 시간을 뒤척이고서야 깨달았다. 10여 년간 내 꿈의 1순위라 생각했던 '작가'라는 것은 '사회적인 목표'였다. 공모전이나 대회 같은 관문을 통과하여, 문단에 들어가고, 인정 받고, 인지도를 넓히는, 일종의 사회적인 시스템에서의 '업(業)'. 하지만 면접관의 물음표가 사라지기도 전에 내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나의 꿈은 '삶에서의 목표'였던 것이다. 직업이나 직책이나 연봉이나 명성 같은 것은 아무것도 결부되지 않은 그냥 말 그대로 내가 바라는 '삶'.

  "난 혼자 살래"라고, 내가 명확하게 말한 것은 12살 때이다. 밝은 황토색 코르덴 멜빵바지를 입은 어느 가을날이라고 기억한다. 지금은 "제발 밖에 좀 나가라", "사람 좀 만나라", "남자 좀 만나 봐라" 라고 회유와 설득을 번갈아 하는 엄마는 그때는 흔쾌히 "그래라" 라고 말씀하셨다. 낮에도 어둑한 거실에서 불도 안 켜고 티브이도 안 보면서 우두커니 바닥에 앉아 있던 40대의 문턱을 목전에 한 엄마의 옆모습도 나는 기억한다. 그보다 어릴 때부터 나는 어렴풋이 '혼자 사는 삶'을 동경해 왔던 것 같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확고해졌다. '싱글 라이프'를 원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와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혼자'는 평가 받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상대가 나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꼬집고 건들까 봐 무서운 거다. 설사 포옹해주더라도 내가 이것조차 못하는 사람인 것을 상대가 아는 것이 싫은 거다. 또 나 역시 상대의 좋은 점보다는 부족한 점, 싫은 점을 보게 되는 것이 불안한 거다. 혹시라도 상대가 짜 놓은 판 위에 트랙 위에 내가 놓이게 될까 봐 경계하는 거다. 이건 아무래도 평균 89.97점짜리 성적표를 받아오자 문제아라는 타이틀을 붙여주던 청소년기의 가풍과 교육관의 영향이지 않을까 싶다. 언제적 일인데 아직까지 트라우마인 척 하느냐고 말하는 이도 있겠지만. 개에게 호되게 물어뜯겼던 사람은 백 미터 밖에서 누가 가래 뱉는 소리만 들려도 심장이 떨리는 법이다.

  이야기가 중구난방이다. 다시 면접으로 돌아가자. 면접을 마무리하며 원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나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게 원장님을 붙잡았다. "저는......" 원장님이 다시 자리에 앉자 나는 말을 이었다.

  "저는 뭐든지 잘하고 싶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긴장을 잘 해요. 그래서 처음 일을 배울 때 많이 떨고요, 배우는게 느릴 수도 있어요. 그래도 기다려 주시면 전 꼭 해요. 제가 전에 직장에서 오래 있었던 건 감사하게도 좋은 분들을 만나서예요. 당시 원장님, 팀장님, 선생님들께서 잘했다, 수고했다, 힘든 부분 있으면 뭐든지 말해라, 훨씬 나아졌다, 이렇게 응원 많이 해주셨거든요. 그리고 강의 경력 하나 없는 저를 뽑아주고, 교수법도 가르쳐주시고, 자료도 주시고, 청강도 하게 해주셨어요."

  나의 갑작스런 장황한 어필 아닌 어필에 원장님은 나이스하게 "우리 회사는 배우는 게 느리다고 보채고 타박 놓지 않아요. 충분히 기다려줄 수 있으니 걱정 말아요" 라며 웃어주셨다.

  이런 걸 보면, 나는 돈을 포기하지도 못하지만, 돈이 최우선인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또 자리 욕심은 없지만 인정에 목말라한다.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그래서 6년이나 근무하면서도 커피 한 번 같이 마신 적 없으면서도, 마지막 날 안 선생님이 선물을 주시며 나를 안아주실 땐 눈물이 왈칵 나올 뻔 했다. 엄마 뻘 되시는 그 분은 첫날부터 마지막날까지 나를 많이 챙겨주셨다. 방패와 갑옷이 되어 주셨다가, 때로는 담요도 되어 주셨다. 성격도 가치관도 취향이나 식성까지 나와 너무나 다른 사람을 존경할 수 있다는 걸 이 분을 만나면서 경험했다. 안 선생님은 자신의 책상 한 쪽에 6년간 세워져 있던 '항상 담대하라'라는 성경 문구와 한동안 카카오 톡 프로필을 장식했던 '사랑'이란 단어가 체화된 분이셨다. 평소에 막막한 기분이 들거나 우울한 감정에 휩싸일 때면 선생님의 책상 구석에 오도카니 자리한 그 문구를 일찍이 배교(背敎)하여 무종교인이 된 모태신앙 출생인 내가 속으로 되뇌어보곤 했다는 걸 선생님은 모르실 거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곁들여야겠다. 몇 달 전부터 알 수 없는 알고리즘에 의해 보게 된 유튜브 영상이 있다. 40대 초중반의, 그러고 보니, 이번 이야기에 40대 싱글 여성들이 자주 나온다. 아무튼 그 분이 하신 말씀이 있다.

  "나도 내가 유튜브를 하고 자영업을 하면서 살게 될 지 몰랐어요. 사실 내 성격하곤 전혀 다른 일이거든요."

  "예전에 제가 이것저것 벌려 놓은 일들이 지금 살아가는 데에 은근히 도움이 돼요."

  이 말이 몇 주간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한 달 반 전에 새 실장님께 퇴사 의사를 알렸다. 퇴사 고민은 몇 년을 했는데, 결단을 내리니, "저 2월까지만 할게요" 라는 말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만약, 원장님과 팀장님이 지금도 계셨으면 퇴사를 결정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오늘 퇴사를 했다. 누구나 하는 별 거 아닌 것일 수도 있고, 또 지금의 대환란 시국에 대책 없는 객기일 수도 있다. 이 두 가지를 다 떠나서 퇴사는 내게 결코 쉽지 않은 큰 결정이었다. 나는 다도해(多島海)의 섬 같은 사람이라, 무리 속에 있으면서도 나만의 생태계를 가진 채 거리가 있어야 한다. 잡목(雜木)처럼 부대끼는 것도 싫고, 무인도처럼 동떨어진 것도 싫다. 그러니 은연 중에 나의 이런 성격을 내비치고 거리를 조율하여 기껏 둥지를 튼 자리를 떠나 새 환경을 물색하고 정착하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피곤하고 염려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우연찮게 시의적절하게도 위 유튜버님의 말을 접하게 되었고, 힘이 났다. 나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다는 모르고, 앞으로 하게 될 시도들이 나중에 내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난 데 없이 세상 낙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론은? 아직 모른다. 여전히 난 글도 돈벌이도 어정쩡하게 양손에 쥐고 있는 상태다. 아, 약간의 우선순위는 결정했다. 나는 '삶에서의 목표'가 '사회적인 목표'보다 중요하다. 고로, 햄스터 집만한 집이라도 내 집을 구하고 그토록 원하던 혼자 사는 삶을 사는 것이 작가가 되는 것보다 간절하다. 이어서, 나는 오늘부로 백수가 되었다. 면접 결과는 일주일이나 뒤에 나온다. 운 좋게 합격해도 수습기간 동안 내가 튕겨져 나갈지, 사측(社側)에서 인내심에 한계를 느껴 나를 고용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보다 먼저 이직할 업종을 뚜렷하게 정하지도 않았다. 그럼 나는 이 긴 글을 왜 썼지? 그것도 모르겠다. 처음엔 글쓰기를 내려놓기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쓰기 시작했었다. 간략하게 20줄 정도만 쓰자고. 때때로 나는 글쓰기를 나의 심리 치료용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의도도 방향도 잃어버리고 감정들을 숨기지 못한 채 중언부언 횡설수설한다. 지금도 어떻게 끝을 맺을지 몰라 뱅뱅 맴도는 꼴이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녀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떠나는 어린 동료를 꼭 안아주던 얼굴,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여기까지 걸어온 자신을 스스로 토닥거리던 얼굴, 오랜 방황과 시행착오가 지금 자신의 생계가 되어준다며 담담하게 말하던 영상 속 얼굴. 나는 훗날 내 자신에게 또 누군가에게 어떤 얼굴이 되어줄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그래서 면접을 보았던 원장님의 질문을 조금 고쳐 내게 자문해보았다. 10년 후에 나는 어떤 얼굴이 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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