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민지 Apr 07. 2020

선인장(2016)

애인에게 선물이라며 커다란 쇼핑백을 받았다. 크고 무겁고 고급스러운 쇼핑백 안에는 외계인의 뇌처럼 생긴 선인장 화분이 들어있었다. 꽃을 사려다가 화분을 골랐다고 멋쩍게 말했다. 물은 한 달에 한 번만 주면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화분은 승진 기념으로 거래처에게 받은 것 같은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말단 사원이지만 금방 이사쯤 된 것처럼 행복해졌다. 카드도 있다고 해서 쇼핑백을 뒤져봤더니, 두툼한 메모지가 나왔다. 커다란 하트와 함께 삐뚤빼뚤한 글씨로 자기 이름이 쓰여 있었다. 사랑스러운 카드. 감격스러운 나.

회사까지 데려다준다기에 애인의 차를 얻어 탔는데, 차 안에 구깃하게 반으로 접힌 메모지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펼쳐봤더니 종이엔 온통 하트만 그려져 있다. “하트 그리는 게 어렵더라고.” 망친 카드 중 하나는 하트가 제일 잘 그려졌는데, 다 그리고 나서 보니까 종이가 뒤집혀있어 망쳤단다. 망친 카드와 안 망친 카드 모두를 고이 챙겨 회사로 돌아와 칸막이에 붙이고, 듬직한 화분도 책상 위에 올렸다. 언제 퇴사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삭막한 내 자리가 이렇게 따뜻해졌다. (2016)

작가의 이전글 아빠 곰 의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